▲정대균 교수가 쓴 <한국 내셔널리즘>과 <한국이 반일을 멈출 날이 올까>
이와나미서점/카도카와
1899년에 경상도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한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한 정연규는 조선총독부 관리인 아버지나 형과 달리 진보적 입장에 있었다. 그는 항일 정신을 가진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2년 뒤인 1921년에 그의 소설 <혼>과 <이상촌>은 배일 작품으로 규정돼 압수를 당했다. 그해 7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혼>이 발간되기도 전에 압수됐다고 보도했다.
정연규의 글이 발표되기도 전에 제지를 당하는 일은 일본 망명 뒤인 1923년에도 있었다. 그해 9월 1일의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과 이를 계기로 자행된 관동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10월 28일 추도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정연규는 도쿄에서 열린 이 추도회의 공동 주최자였다. 그날 그는 추도사를 낭독하기로 돼 있었지만, 일본 측의 방해로 하지 못했다. 일본 측이 "우연히 잊어버린 것이니 용서하여 달라"며 그를 달랬다고 11월 1일 자 <동아일보>가 썼다. 12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는 그가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는 대담한 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실렸다.
이처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정신이 투철했고 일제의 억압도 많이 받았던 정연규는 만주사변 이후에는 전혀 딴판이 됐다. 2019년에 <어문논집> 제77집에 게재된 모희준 선문대 연구원의 논문 '정연규의 과학소설 <이상촌> 연구'는 "재일조선인 작가로 활동하던 정연규는 그러나 1931년 돌연 친일로 돌아선다"라며 "만주사변을 적극 지지하고 선전하는 일에 앞장"섰다고 설명한다.
정대균 교수의 아버지인 정연규는 나중에 뜻을 꺾기는 했지만 한동안 일제의 억압과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도 정대균 교수는 "억압이나 수탈의 역사"로 일제강점기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수상 소감에서 밝혔다. 정 교수의 일제 옹호 활동이 아버지가 당한 피해마저도 부정할 소지가 크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국가기본문제연구소가 얼마나 냉혹한 마음으로 수상자를 결정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라도 한국에 대한 역사 공격을 강화하려 하고 있으니, 한국에 대한 일본 극우의 험담이 어느 수준까지 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일본과 손잡는 것은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겠지만, 일본이 한국과 손잡는 것은 그보다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한국이 일본과 손잡는 것은 결과적으로 북한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도 적대하는 길이 된다. 한국 입장에서는 모험이다.
모험을 함께하는 동반자는 무엇보다 믿을 만해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와 손잡고 모험에 나서는 것은 위험을 가중시킨다. 한국과 손잡은 순간에도 일본은 램지어나 정대균 같은 이들을 앞세워 한국을 험담하고 있다. 그런 극우세력이 주도하는 일본과 손잡은 윤석열 정권의 앞날이 밝아 보이지 않은 것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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