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이 잃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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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정(arete)등록 2024.05.25 15:35
"왜냐하면 블룸같이 영리하고 거의 냉정하다고 할 정도의 사람이 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지, 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결정적인 순간에 권총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했는지의 문제를 앞으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32쪽 

1974년 2월, 27살의 한 젊은 여자가 권총으로 신문기자를 살해했다. 기자의 왜곡보도로 심각한 정신적 물적 피해를 입은 한 개인의 선택이었다.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독일신문 <차이퉁>지는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가정관리사가 살인강도범을 도주시켰다고 1면에 대서특필했다. 수배중인 루트비히 괴텐은 은행 강도가 확실하지만 살인에 대해서는 그저 혐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문은 그를 살인강도범이라 보도했고 블룸의 가족사나 인간관계, 재무상황 등이 어떤 확인 절차나 증거도 없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신문을 읽는 수백만 독자들은 악의적으로 편집된 정보만을 무차별적으로 제공받았다. 

카타리나 블룸은 가정 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근검절약해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다. 루트비히 괴텐과는 카니발 축제때 처음 만난 사이지만 자기 아파트로 데려온 다음 날 아침 그를 도주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신문은 그녀를 살인범 괴텐과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던 약혼녀라 소개했다. 

몇몇 신문들이 가세해 얼마나 황당한 추측성 기사를 써댔는지 더 알아보자. 카타리나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과 어머니는 품행이 좋지못한 청소부였다는 기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 한 두 명이 어디서 우연찮케 들은 한 두 마디 말을 단초로 작성된 것이었다. 카타리나의 사생활은 기자에 의해 멋대로 재단되었는데 가령, 어머니를 닮아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느니 범죄자인 오빠처럼 재산형성의 근거가 의심스럽다느니 하면서 여론재판을 유도하며 혐의자일 뿐인 한 인간을 밑도 끝도 없는 모멸감의 늪으로 빠뜨렸다. 

이런 짐승같은 행태를 작가는 '비열한 무지함'이라 표현했다. 오도된 정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똑똑하단 소리를 듣는 신문기자들이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 때문에 작가는 비열하다고 한 것이다. 아울러, 정보학자들 즉, 언론관계자들은 어떻게 정보를 구하는지 의문을 제시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혐의자는 무죄로 추정되어야 마땅하다. 신상공개도 할 수 없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무고한 사람의 명예와 삶을 짓밟는 왜곡을 기자들이 대담하게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괴텐이 통화하려고 했던 사람은 전부 군 소속인들과 그 부인들이었고, 개중에는 장교와 장교 부인들도 있었다고 하니 커다란 스캔들로 번지는 걸 무마하려는 권력층의 궁여지책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카타리나 블룸은 언어의 쓰임을 신중하게 생각하는 냉철한 여성이다. 그녀는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큰 소리로 읽어달라고 요청하면서 몇몇 표현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령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는 '신사들이 치근거렸다'는 표현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다정함과 치근거림은 엄연히 다른 말로서 다정함이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이란 일방적인 행위라는 것이었다. 또한 블로르나 박사 부부의 '친절함(호의)'이란 표현에 대해서도 친절함 대신에 선함이란 단어를 고집했는데 그 부부의 행동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성품 내지는 본성 같은 것으로, 친절함보다는 선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진실한 언어 표현을 찾으려는 이런 태도가 진실을 조작하는 언론의 언어사용과 묘한 대조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안간힘을 쓴 들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오도된 정보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개인이 행할 수 있는 조처는 너무도 약소하다. 카타리나 블룸은 결국 기자를 향해 총을 쏘았고 자수하러 가기 전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단골카페로 갔는데 카페사장과 나눈 대화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블룸이 글로 진술한 이 대목은 그녀가 느꼈을 절망감을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 두 세 번 곱씹어 읽었다. 여기에 적어본다.

"케테는 나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녀는 할머니 방식대로 잘 간 커피에 물을 부어 내려 만드는, 그녀 특유의 커피를 한 잔 내게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차이퉁>의 가십에 대해 말을 꺼냈습니다. 친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소한 조금은 그 기사를 믿는 눈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난 그녀에게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넌 이 자를 정말 사랑한다는 거네'라고요. 그래서 난 '그렇다'고 말했지요. 나는 커피를 잘 마셨다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뫼딩의 집으로 갔어요. 그때 그는 나에게 아주 친절했습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민음사, 143쪽

"생각할수록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임마누엘 칸트, 1724~1804)

살면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고 경탄해본 적은 나 역시 한 두 번이 아니기에 칸트의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니? 도덕률이란 말을 양심, 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기준으로 바꿔 생각해보니 얼추 이해된다. 그러니까, 카타리나 블룸이 총을 쏜 뒤에 후회도, 유감도 없었노라고 진술했을 때 적용될 법한 그런 말은 아닐까. 그러므로, 내 마음속 도덕률에 비춰 판단해보더라도 블룸이 기자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긴 일은 매우 정당해보일 뿐 아니라, 기자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과응보라는 얘기다. 

50년 전 독일에서 벌어졌던 사건인데 하나 낯설지 않다. 왜곡보도에 대한 처벌이 가차없이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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