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8 11:06최종 업데이트 24.05.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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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거리도 깨끗하고, 안전하고, 여러 편의시설도 이렇게나 좋은데, 왜 한국 거리에선 장애인을 보기가 힘든가요? 한국에도 장애인은 많다고 들었는데…." ⓒ 픽사베이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해석이나 평가도 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우리 역사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민족주의자, 아니면 시쳇말로 '국뽕'이 아니냐는 황당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역사는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자취다. 그래서 뭔가를 지키려는 보수파의 흔적도, 뭔가를 바꾸려는 진보파의 흔적도 있다. 그들이 다투기도 어울리기도 하면서 다 같이 삶을 꾸려온 자취가 역사다. 그렇기에 역사는 역사일 뿐 그 자체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 스스로가 '국뽕'이 아닌가 의심해 본 적이 있었다. BTS나 블랙핑크를 비롯한 우리 가수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영화 <기생충>이 콧대 높은 미국 아카데미상을 거머쥐고,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 등의 드라마에 관한 세계의 찬사가 이어지고, 타의 추종을 불허한 코로나 대응 실력을 보면서 나는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란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때의 감정이 정말 깔끔하게 지워졌다. 그럼, '국뽕'을 면해서 다행인 건가? 그런데 나는 왜 그때가 그리울까?

"한국 거리에선 왜 장애인 보기가 힘든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1월 22일 오전 8시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승강장에서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3주기 제5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재개했다. 활동가들은 서울교통공사의 강제 퇴거 명령을 받고 역사 밖으로 쫓겨났고 시위는 1시간 반 만에 마무리됐다. ⓒ 복건우

 
며칠 전, 우연히 듣게 된 한 외국인의 말이 내 가슴속 그리움에 불을 지폈다.

"아파트 현관 입구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하고 카페 빈자리 테이블에 놓여 있는 최신 스마트폰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내가 한국에 왔다는 인증샷을 보냈어요. 한국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니까요."

각자 나라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한국에서의 낯설지만 기분 좋았던 경험을 떠들기에 바쁜 외국인들의 생생한 증언에 나는 나도 몰래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나 역시 얼마 전에 카페에서 떨어뜨린 지갑을 현금 한 푼 잃어버리지 않고 하루 만에 되찾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실감이 났다. 역시 우리나라는 아직 살만한 나라였다.

그런데 잠시 후, 내 기분은 살짝 들뜬 만큼 더욱더 세게 곤두박질 처지고 말았다.

"그런데요, 거리도 깨끗하고, 안전하고, 여러 편의시설도 이렇게나 좋은데, 왜 한국 거리에선 장애인을 보기가 힘든가요? 한국에도 장애인은 많다고 들었는데…."

이미 많이 들은 소리였고, 그때마다 답답한 마음에 정치인과 정부 당국의 안일하고 삐뚤어진 태도에 화를 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라에는 등록된 장애인이 인구의 5%를 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20명 중 한 명은 장애인이란 얘기다. 그런데 왜 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들까? 안타깝고 쓰린 것은 그들이 안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못 나오기 때문이란 거다.

장애인에 대한 한국사회 인식, 왜 이럴까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중 많은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애인이 유독 한국에는 눈에 자주 띄지 않는데 놀란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그 이유가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은 각종 시설과 장애인을 대하는 부정적인 태도인 것 같다고 답한다. 그리고 비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 본인들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중증 시각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적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몇몇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보다도 훨씬 낫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엄연한 국민인 장애인을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깎아내리는 정치인도 있고, 20년이 넘게 이동권을 요구하는 데도 제대로 답조차 안 해주는 정부 관료도 있으니까.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장애인을 그냥 몸이 불편한 사람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그런데 경제 선진국에 이어 문화 선진국의 반열에도 다가서려던 우리나라가 장애인에 관해서는 왜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혹시 과거로부터 이어온 잘못된 인식 탓은 아닐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고귀한 인간 이성과 철학의 상징 고대 그리스, 하지만 이들에게 장애를 가진 아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 바티칸박물관 소장

  
나름대로 역사를 좋아한다면서도 정작 나 같은 장애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무도 소홀했었다. 그래서 맘먹고 찾아봤다. 그리고 세 가지 면에서 놀랐다. 첫째는 생각보다 장애인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적다는 것이고, 둘째는 장애인에 관한 서구 사회의 태도가 지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것, 셋째는 이와 달리 우리는 장애인에 관한 한 옛날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하고픈 이야기가 무척 많다. 우선 충격적인 서구 문명사회의 과거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와 이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우리 옛날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 시각 장애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우리가 장애인에 관해 잘못된 인식과 태도를 갖게된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이야기도 해 보겠다.

먼저, 유럽 중심의 서구 여러 나라의 옛날이야기다. 장애인을 그냥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려는 노력이 결실을 보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나 시설도 잘 갖춰진 그들 나라도 옛날에는 이랬다.

고대 그리스, 자타가 인정하는 유럽 문명의 시작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름만 들어도, 고귀한 인간 이성의 상징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이들이 장애인에 관해서는..., 아 이럴 수가!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는 죽여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그런 아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유폐시켜야 한다는 자기 생각을 밝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어떤 기형의 아기도 양육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는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 장애를 가진 영아 살해는 아마도 아테네나 스파르타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일인 것 같다.

그리스 문명을 흡수해서 고대 유럽 문명을 완성한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표법'에는 장애를 가진 아이는 죽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혈통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20세기 초에 전 세계를 휩쓸었고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절정에 달했던 '우생학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장애인 차별하던 유럽과 달랐던 동아시아, 그리고 대한민국

다행히도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 크리스트교가 유럽 문명을 지배한 덕분에 이런 만행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장애를 악마가 빙의한 것이라거나, 부모나 그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라는 인식은 여전히 서구 사회 전체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아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와 같은 시기의 중국 한 나라 역사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지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 동아시아 문명를 완성한 당나라는 아예 법으로 장애인에 관한 처우를 규정했다. 병을 가진 환자처럼 일상생활이 가능한 잔질, 겉보기에도 장애를 가졌고 일상생활도 어려운 폐질, 아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독질로 장애인을 분류해서 세금과 요역을 면제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생활이 곤란한 폐질과 독질 장애인에게는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 사람 중 한두 명의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면서 그들의 물심양면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당나라는 유목민족 선비족이 세운 나라다. 발달한 황허 문명의 한족을 지배하려고, 율령을 만들고 3성6부제, 조용조 세법과 같은 정치 경제 제도를 정비하면서 장애인에 관한 법률까지 빠뜨리지 않았다는 게 정말 놀랍다.

옛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에는 병을 가진 사람으로서 장애인을 지원한 기록이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다. 고려는 당나라와 같이 장애인을 분류하고 비슷한 지원을 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는데, 지금의 요양보호사나 활동보조사와 같은 개념이 이미 고대 사회 때부터 있던 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조선의 기록이다. 조선은 사람을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이분적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장애인도 그냥 능력이 다른 사람으로 인정했다. 백성들도 그냥 몸이 좀 불편한 사람으로 각자에게 알맞은 일을 했으며, 폐질과 독질 장애인은 고려 때보다도 더욱 발전된 지원을 받았다.

한 예로 지금의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애인이 조선에는 흔했다. 태종 세종 때의 허조는 척추장애인이었지만 좌의정에 올랐고, 중종 때의 권균은 간질, 즉 뇌전증 환자였지만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정승 윤지환은 한 쪽 다리가 없었고, 영조 때 이덕수는 듣지 못했음에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영정조 때 재상 채제공은 사시인 데다가 한 쪽 눈을 실명한 시각 장애인이었다.
   

영정조 시대 재상 채제공 초상화. ; 같은 하늘 아래 살 수없다던 상대 당파 세력도 장애를 가진 그의 눈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거의 모든 왕 재위 때마다 한 명 이상의 장애인이 정승이나 판서와 같은 당상관직에 있었다고 하는데, 온갖 유언비어가 등장했던 당쟁의 시기에도 이들의 장애를 문제 삼는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직 하고픈 말이 많다. 혹시 다음을 기다리기 어렵다면 <근대 장애인사: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를 비롯한 고려대 정창권 교수의 책들을 찾아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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