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4월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제주 4.3과 트라우마 리질리언스 / 국가범죄로서의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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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을위한과학기술인포럼(fosep)등록 2024.05.20 09:06
공공을위한과학기술인포럼(FOSEP)은 과학기술자와 시민들이 함께하는 단체로 과학기술의 공공성, 합리성, 민주성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입니다. FOSEP은 매월 세미나, 강연, 연구발표 등의 형식으로 월례모임을 진행합니다. 그간 FOSEP모임의 결과물은 책, 이슈리포트 등으로 발표되었는데, 특히 2023년에는 과거 한국 현대사에서 정권과 사회 등의 압력으로 과학기술이 악용된 사례들을 짚어보고 정리한 '과학의 눈으로 현대사를 되돌아보다'(생각나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4월 말에 진행한 FOSEP 월례모임에서는 제주 4.3 연구자인 김지민 박사와 세월호 참사를 국가범죄의 관점에서 분석해 온 연구자인 박영대 前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팀장을 모시고 귀중한 강연을 듣었습니다. 두 연구자의 강연 내용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요약하여 기사로 작성하였습니다.
 
강연 1. 제주 4.3과 트라우마 리질리언스 : 살암시민 살아진다 / 김지민
 
탄압, 항쟁, 대학살
제주 4.3은 해방 후 미군정 하의 혼란 속에서 3.1절 경찰 발포 사건과 민관 총파업 등의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며 급격히 전개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의 항쟁이 자칫 대한민국 정부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대통령령으로 계엄령을 선포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제주 4.3의 인명피해는 엄격하게 잡아도 25,000명에서 30,000명에 달한다. 제주 4.3의 유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 기준을 통과해야 했는데, 2023년 3월 기준 유족은 94,262명에 달한다. 육지에 있는 형무소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중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3,678명이고, 수행피해생존자는 312명이다. 김지민 박사는 10세 이하 818명 등 어린이·청소년 희생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제주 4.3이 국가에 의한 분별없는 학살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집단학살, 고문, 폭행, 성폭력, 강제 이주(소개령) 외에도 화를 피하기 위한 강제 결혼, 한국전쟁 발발 후 예비 검속에 의한 학살,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되는 등의 피해 사례도 다수 확인되었다. 김 박사는 장기간에 걸친 트라우마 경험에도 불구하고 4.3 생존희생자와 유족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건강 실태조사가 2015년 단 한 차례에 그쳤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으며, 최소 4년 단위의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기제와 회복 탄력성
김 박사는 트라우마의 회복 탄력성에는 다양한 사회적 기제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배경으로서의 문화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제주 4.3에 대한 사법부의 재심, 국가 단위로 열리는 추념식과 같은 사회적 기제들이 희생자 유족들의 개인 인식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회복 탄력성이 새롭게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유족들에게 갖는 특별한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김 박사는 강조했다. 국가폭력 가해자인 정부를 대표하여 대통령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당시 법 집행에 아무런 근거가 없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생존희생자와 유족에게는 중요한 회복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적인 사과에는 반드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제주 4.3의 정명(正名)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백비(白碑)는 우리 사회가 아직 제주 4.3을 무엇이라 명명해야 할지 합의하지 못했다는 상징이다. 제주 4.3은 처음에는 '폭동', '반란'으로 불리다가 다소 중립적인 '사건'으로 칭해졌으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가 진행되면서부터는 '(양민)학살'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제주 4.3을 항쟁 또는 통일운동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제주도 현지에서는 여전히 피해자 유족과 가해자 유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두 집단 사이에는 정명을 둘러싸고 엄연한 관점 차가 존재한다. 김 박사는 동학농민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제주 4.3의 정명도 개인사를 어느 정도는 초월할 수 있는 시점이 되어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강연 2. 국가범죄로서의 세월호 참사 / 박영대
 
구조하지 않은 국가, 감시하는 국가
2014년 4월 16일 당시 팽목항은 아비규환이었다. 박영대 전 팀장은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국가가 한 일 중에 잘한 일은 유족들을 위해 진도체육관에 담요를 비치한 것뿐이었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 외의 국가의 모든 대응은 비상식적이었다. 해경은 대피하지 못한 승객을 구조하지 않았으며, 언론은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냈다. 한참 뒤에야 중대본에 나타난 대통령이 엉뚱한 질문을 던진 일은 모두가 기억하는 바다. 혹시라도 배 안에 생존자가 남아있을까 가족들이 애끓는 마음으로 발을 구르고 있을 때, 도면도 없이 마구잡이로 진행된 공기 주입은 결국 선체 전부를 바닷속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국가가 부재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색 작업을 감시하는 일, 그리고 수습된 희생자 시신이 바닥에 방치되지 않도록 검안소 설치를 요구하는 일도 유가족이 직접 해야 했다. 그해 11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유가족은 국회와 광화문에서 긴 농성을 스스로 조직하고 주도해야 했으며, 극우단체와 정치인들의 패륜적 공격에 반복해서 노출되어야 했다. 국가는 그 와중에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참사 당일부터 유가족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해경의 구조 방기
참사 당시 해양경찰은 끝까지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해경 지휘부는 그 이유를 '퇴선 중에 발생할 수 있는 2차 사고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세월호 침몰이 진행되던 시점에 해경청장을 포함한 지휘부가 상황실에서 통신망을 청취하고 있었음에도 누구도 구조 상황을 지휘하지 않았고, 퇴선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박 전 팀장은 세월호 참사와 같이 관료의 부작위가 개입된 재난이 발생하면 책임 회피를 위한 은폐, 축소, 꼬리 자르기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 결정권자와 책임자는 관료제 뒤에서 처벌을 피하게 된다. 이렇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발방지책 마련 또한 요원해진다.
 
'국가와 민(民)의 무매개적 충돌'
박 전 팀장은 세 차례의 여야합의와 세 차례 유가족의 거부, 그리고 네 번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은 여/야가 합심하여 유가족에게 수사권, 기소권 없는 특별법안을 받아들일 것을 겁박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일베 등에 유가족을 공격하라고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유가족과 합심하여 여당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여당과 합심하여 유가족을 공격하는 이러한 야당의 무가치성은 참사 이후에 치러진 지방선거와 이어진 두 차례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참패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촛불항쟁은 '국가와 민의 무매개적 충돌'이었으며 여기서도 야당의 무가치성과 시민사회의 무기력함이 확인된다고 지적하였다. 
박 전 팀장은 촛불 항쟁의 결과로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도 세월호 이슈가 지속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청와대의 세월호 문건 파기와 해양수산부의 유골 은폐 사건 등이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음을 지적했다.
 
재난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는 '내인설'과 '열린안'으로 나뉜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사참위 또한 두 개의 안 중 하나를 확정하지 않은 채 활동을 마무리했다. 박 전 팀장은 사참위가 '열린안(외력설)'을 배제하지 못했던 데에는 선체의 급선회, 레이더에 잡힌 미확인 물체, 그리고 급선회 시 튕겨 날아간 사람들 등에 대해 검토가 필요했던 이유도 있었으나, '내인설'은 곧 해피아의 논리라고 본 유가족들이 강한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고 말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몇 차례 위원회가 발족하고, 마침내 선체가 인양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유가족은 국가기관에 의한 사찰, 탄압,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박 전 팀장은 유가족들이 결코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우리 사회의 폭압적 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전선으로까지 나아가서 홀로 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는 위험과 안전에 대한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리고 그 위험이 누구에게 전가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권력관계를 드러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권력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은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다고 박 전 팀장은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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