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방경찰청이 세운 안병하 치안감 흉상
연합뉴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실정법 준수가 큰 의미가 없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실정법을 뛰어넘는 저항권 행사가 용인될 수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전두환과 신군부를 향해 총을 들고 무장한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였다.
그런데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볼 만한 상황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른바 준법투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병하 도경국장이 이끄는 전라남도경찰국에 의해 전개됐다. 신군부의 영향을 받는 내무부 치안국은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하라'는 지시를 거듭거듭 내렸다. 하지만 전남도경은 총을 내려놓고 시민 안전에 역점을 뒀다. 전남도경은 이런 식의 비협조를 통해 결과적으로 전두환에 맞서는 형국을 만들었다.
1980년 5월 19일, 안병하 국장은 경찰의 총기와 실탄을 광주 시내 제31보병사단(충정부대)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5·18 이튿날에 광주 경찰을 비무장으로 전환시킨 이 소산 조치에 관해 당시의 현지 경찰관 일부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5·18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 있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이 쓴 <안병하 평전>은 그런 평가들을 소개한다.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 최아무개(전남도경 상황실)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 안아무개(광주경찰서 수사과)
일선 경찰의 말에서도 느껴지듯이, 전남도경이 계엄사령부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면 1980년 5·18은 '시민군 대 계엄군'이 아니라 '시민군 대 군·경'의 대결이 됐을 것이다. 5·18이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데 전남도경이 일조한 셈이다.
물론 전남도경도 당시 국가권력의 죄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가 작년 12월 26일 펴낸 보고서인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한 연행, 구금, 조사과정 등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사건>은 "5·18 기간 중 체포된 사람들은 제31사단, 상무대, 공군 헌병대, 광주교도소, 지역 경찰서/파출소 등으로 연행·구금"됐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전남도경의 지휘를 받는 광주 경찰에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5·18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안병하 국장을 비롯한 전남도경의 발포 거부는 그런 한계점과 더불어 인식될 필요가 있다. 신군부의 인권 탄압에 동조한 측면과, 신군부의 강경진압 요구를 거부하고 총을 들지 않은 측면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병하의 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