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와서 분노조절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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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주(mukhyangr)등록 2024.04.11 08:28
아이와 강릉 여행을 다녀와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분노 조절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인내를 배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 보상으로 조금 더 나은 인격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인내라는 걸 배우기는 했는데, 잘 못 배운 것인지, 배우다가 만 것인지, 바닥이 나버린지 오래다. 더 나은 인격은커녕 성격이 한층 안 좋아졌다. 인식과 성찰의 구간이 있었지만 어느새 화에 관성이 붙어서 브레이크가 들지 않았다.

나 스스로를 변호할 여지는 많다. 오전에 애 둘을 풀세팅 해서 보내려면, 거기에 나 자신도 나가야 하니 챙기려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냐고. 한번 말해서 듣는 아이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던지며, 긴박감 넘치는 오전 시간에 동의어 반복이 5번이 넘어가면 폭발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화라는 불 속에서 아이들을 보니, 특별히 아직 어린 둘째는 그렇다 치고 어지간히 알 것들을 알아가는 첫째는 밉상이 된지 오래였다. 어쩜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들어서 뭐 하나만 걸려라 하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발작 버튼이 쉽게 발동됨을 막을 길 따위는 막막해보였다.

이랬던 나인데 여행은 내 안에 어떤 영역에 소화(消火)를 가져다 준 것 일까.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잔인하도록 흘러 넘치던 그 '화'가 어떻게 '해'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걸까.

조건부 사랑의 희석됨이 가장 크지 않았나싶다. 존재만으로, 단지 그것만이 조건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유치원 때 까지 였던 것 같고,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알게 모르게 덕지덕지 조건이 붙었던 것 같다.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첫사랑 같은 것이 재건축 되었다. 주어진 공부를 하는 것,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는 것, 말도 안되는 것을 떼 쓰거나 억지 부리지 않는 것 등등. 중요하지 않은 덕목들은 아니다. 단,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밀어붙여서 사랑을 상실할 정도가 될 일도 아니었다.

바다를 걸으며, 솔밭을 걸으며, 제법 근사한 식사들을 하며, 단 둘이 잠들며, 중요한 것은 물보다 진한 피로 엮인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삶과 사랑이었다. 건강하게 살아있다는것,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 하는 것, 마음과 언어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등. 그게 행복이었다.

메말라 버린, 얼어붙었던, 사랑의 고요한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마음이 다정해졌나보다. 조건들을 한껏 뒤로 밀어버리니 분노 조절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다녀와서 지금까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약빨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괜찮은 기분이 이어진다. 신기한 건, 그렇게 화를 발하고, 악을 쓰고, 제발 제발을 할 때는 씨알도 안 먹히던 녀석이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법 말을 더 많이 하고, 제법 설득이 되고, 제법 잘 움직인다.

관계의 온도가 훈훈해졌기에 일어나는 일 같다. 전에는 그런 따스함도 없으면서 차가운 말들로만 밀어붙었기에 아이도 힘껏 튕겨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물론 여전히 워낙 미지의 영역이라 겸손할 뿐이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분명히 있으니 그 화력 조절을 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다정한 나날들이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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