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당시 제주도 시내 밤거리 풍경. 제주의 저녁은 중심가를 벗어나면 거리는 한산해진다.
김지영
70만이 사는 제주도 면적은 천만 서울의 3배다. 인구밀도가 매우 낮긴 한데 제주도 인구의 70%가 제주시에 살기 때문에 시내 밀집도는 매우 높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도 교통체증이 있고 시내 주차 시비는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반면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속이 뻥 뚫리는 도로와 적도스러운 자연을 마주치게 된다.
즉 인구밀도가 높은 시내권과 낮은 시외권의 짧은 구간거리와 서로 다른 대중교통 수요가 공급 체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런 특성은 효율적인 대중교통 체계에 구멍을 내고 그곳을 택시가 메꾸는 형국이다. 8년 전에는 그랬다. 첫 번째 문법이다.
택시와 관련된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제주에는 크고 작은 유흥가를 모두 수렴하는 음주가무의 3대 성지(?)가 있다. 신제주 재원아파트 사거리, 구제주 시청, 동쪽으로는 인제수협사거리가 그곳이다. 특히 제주도의 깊은 밤은 유흥가만 아니면 일찍 잠드는 거리여서 적막감과 함께 모든 도로가 한산해진다.
해서 성지순례를 마친 유흥객들이 서둘러 택시를 타고 떠나는 시간이 되면 적막하고 한산한 길 위로 택시들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제주도의 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 시간 빨간 빈차등을 켠 택시들이 세 곳의 유흥가로 모여들었다가 취객을 태우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의 행렬이 암흑을 가를 것이다. 이어 가까운 시외에 손님을 내려 준 빈택시들이 포뮬러 경기장을 질주하듯 시내로 모여드는 광경은 장관이다. 이런 심야 왕복을 몇 차례 했는지가 그날 매출의 관건이다.
두 번째는 여행객이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1970~80년만 해도 가장 많이 찾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고 비행기에서 내린 신혼부부는 여행 기간동안 대절한 택시를 타고 관광을 했다.
1990년대 결혼한 나도 그런 문법에 따라 제주에 가서 택시를 대절했고 택시기사가 내려 준 관광지를 구경하고 사진도 택시기사가 선택한 배경에 택시기사가 주문한 자세로 찍었는데 사람만 바뀐 똑같은 사진을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집에서도 흔하게 보던 시절이었다.
시절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제주도는 여행자의 섬이다. 택시관광 대신 렌터카 여행이 대세가 되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올레길이나 한라산 등반 등의 이유로 대중교통 여행을 한다. 차가 있는 여행객들도 저녁에는 숙소에 차와 짐을 풀고 제주시내를 즐기기 위해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 산업의 관점에서 관광객 수요는 육지에서는 변수로 작용하지만 제주에서는 상수다. 이 점이 육지와는 다른 제주택시만의 장점이다.
마지막 문법은 술과 괸당이다. 제주에서 7년을 살면서 제주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육지것과 제주사람의 차이가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사람들은 대개 투박하고 진실됐다. 그리고 '찐' 제주토박이들은 한결같이 '말술'을 마셨다. 거기에 괸당문화가 한 술 더했다.
친인척의 제주도 방언이 괸당이고 괸당 중심의 문화가 제주인들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탐구는 학자들의 몫이지만 택시기사 입장에서 괸당을 말하자면 참말 고마운 문화다.
왜냐하면 제주 사람들 일상 안에 괸당문화는 많은 모임을 만들어냈고 많은 모임은 많은 술자리를 만들어냈으며 많은 술자리는 불가피하게 많은 대리운전이나 택시를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은 정말 모임이 많다.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서부터 학교와 직장에 친인척 모임까지 매달 치러내야 하는 모임이 몇 개다. 육지 사람들도 그런 모임들이 있지만 섬 문화의 특성 때문인지 제주 사람의 자신을 낳은 땅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는 억지로는 끊어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괸당문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나는 잡았던 운전대를 놓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망치를 들었다. 제주에서 5개월 택시생활은 내게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금은 불편한 대중교통과 여행객과 술과 괸당문화 덕이었다.
덕분에 네 식구 생활비를 해결하면서 사람이 사는 섬의 구석구석까지 밟을 수 있었다. 제주에 살아도 만날 수 없었던 다양한 제주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육지것이라는 이유로 택시운전사인 나를 환대해 주었다.
제주에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큰 사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었다. 아내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지만 다시 살아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택시를 그만둔 다음 해 이삿짐을 싸서 가족들과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오른 나는 후미에 서서 점점 희미해지는 제주도를 아쉬운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제주도는 계속 살아도 좋았고 계속 살고도 싶은 곳이었지만 점점 나이 들어가는 나와 아내에게도 가까이 사는 괸당이 소중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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