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혁신당 대전광역시당이 지난 24일 오후 대전 중구 문화동 기독교연합봉사회관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조국 당대표는 "윤석열 정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파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장재완
조국혁신당이 비례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달 3일 창당된 이 당은 18일 보도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26.8%를 기록해 국민의미래(31.1%)에 이어 2위에 올랐고(주석 1), 25일 보도된 리얼미터 조사에서 27.7%를 기록해 국민의미래(29.8%)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2).
만약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도 아닌 조국혁신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많이 확보한게 된다면, 이는 비례대표제를 한국에 도입한 사람들의 구상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비례대표제 악용한 박정희
과거에 '전국구'로 불린 비례대표제도는 득표율을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하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돕는 등의 취지를 띤다. 민주적 취지를 갖는 이 제도를 국내에 도입해 지극히 비민주적으로 활용한 쪽이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은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이 제도를 다수당의 폭주를 돕고 소수당의 등장을 견제하는 쪽으로 역이용했다.
1963년 11월 26일의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1961년 5·16 쿠데타로 해산된 국회를 새로 구성하는 기회였다. 그해 1월 16일, 비상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하고 당일부터 시행했다. 이 법 제13조는 "의원의 선거구는 지역선거구와 전국선거구의 2종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비례대표제가 한국에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법 제125조가 정한 전국구 의석의 배분 방식은 제도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제125조 제2항은 "제1위로 득표한 정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이상일 때는 각 정당의 득표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한다"고 규정했다. 제1당이 지역구에서 50% 이상을 득표했을 때는 각 당의 득표율에 따라 비례 의석을 배분하기로 한 것이다. 뒤이어 제3항은 이렇게 규정했다.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미만일 때에는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하고 잔여 의석을 제2당 이하의 정당에 득표 비율로 배분한다."
제1당은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해도 전국구 의석 절반을 무조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나머지 정당들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받도록 하면서도 제1당에만 비합리적인 특혜를 줬던 것이다.
제15조는 "전국구의 의원 정수는 지역구에 의하여 선출되는 의원 정수의 3분의 1"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지역구에는 141석, 전국구에는 44석이 배당됐다. 전국구가 44석이나 됐기 때문에, 제1당이 유력시되는 민주공화당이 50% 득표에 실패하더라도 전국구 22석을 차지해 과반수를 확보할 여지가 있었다.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당선된 뒤에 치러진 11·26총선에서 공화당은 33.5%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윤보선이 이끄는 민정당은 20.1%로 2위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전체 175석의 62.9%인 110석을 가져가고, 민정당은 22.9%인 40석을 가져갔다.
민정당의 경우에는 득표율과 의석 비율이 거의 일치하는 반면, 공화당의 경우에는 의석 비율이 득표율의 2배 가까이 된다. 소수 정당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제1당을 보호하는 제도로 악용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전국구 도입에 관해서는 총선 훨씬 전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1962년 12월 21일 자 <동아일보> 우단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인 이인은 전국구 도입을 바라는 국민 여론이 형성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혁명정부에서 비례대표제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혁명정부가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것은 얕은 정치적 저의를 엿보이고 있어 유감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기사에 나온 강문용 성균관대 교수와 이항녕 고려대 교수는 전국구 의석을 많이 두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강문용 교수는 "반수까지 가서는 안 되며 3분의 1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전국구 의석을 많이 늘려 과반수를 관철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중을 당시 사람들이 경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발언들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원대 복귀하겠다는 애초의 약속과 달리, 민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직면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기성 정치인들에게 제약을 가한 이들은 민정 실시에 대비한 정치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징꼬사건 같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이는 4대 의혹 사건으로 불리며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해 둔 상태에서 민주공화당 창당을 은밀히 추진했다. 공화당 사전 조직 혹은 비밀 창당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원대 복귀 약속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들이 반칙을 일삼는 집단임을 보여줬다. 거기다가 박정희 정권은 식민 지배 청산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짓밟고 대일 굴욕외교까지 추진했다.
민심이 박정희 정권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현상으로도 증명되고 있었다. 박정희의 우군인 군부 안에서는 툭하면 '반혁명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의 민정 추진에 실망한 혹은 박정희에게 도전하는 군인들이 일으킨, 또는 박정희가 군부 내 정적을 숙청하고자 일으킨 반혁명 사건은 대략 10건 정도나 된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역모 사건이 빈발했다는 것은 그것이 진짜든 조작이든 박정희의 입지가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군인들이 동요한 것은 이들이 민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국민들은 물론이고 군부도 믿기 힘들어 하는 이 같은 상황이 "제1당의 득표 비율이 100분의 50 미만일 때에는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2분의 1을 배분"한다는 선거법 조항의 신설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앞날에 대한 박정희의 불안감이 비례대표제를 한국에 들여오는 결정적 요인이었던 셈이다.
1963년 총선은 박정희 정권이 제3공화국을 여는 준비 작업이었다. 새로운 공화국의 정치 지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편법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전국구 제도가 나왔다. 한국의 비례대표제 도입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수당 이익 위해 운용된 비례대표제 역사, 변화 생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