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파의 사진. 맨 첫줄 오른쪽에 앉은 이가 김립이다.
임경석 제공
김립 같은 능력자가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이념과 사상에 개의치 않고 상하이로 모여든 것은 독립운동의 전망을 밝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진영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얼마 안 가 분열됐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권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분열상을 노정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것이 김립 사건이다.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측은 1919년 8월에 사람들을 소련에 보내 40만 루블 혹은 400만 루블의 선전비를 받았다. 하지만 이 돈은 이르쿠츠크파에 탈취됐다. 탈취 시도가 실패했다는 설도 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총리였던 그해 11월에 상하이파는 소련에 자금 지원을 재차 요청해 60만 혹은 200만 루블을 약속받고 일차로 60만 루블을 받았다. 이동휘의 밀명으로 이 돈을 인수하러 간 한형권은 20만 루블은 소련 외교부에 맡기고 40만 루블은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에게 전달했다. 이 돈의 가치는 훗날인 1948년을 기준으로 4억 원에 해당한다.
이 상황에서 '배달 사고'가 발생했다. 김립이 건네받은 자금은 임시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반병률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인 '김립과 항일운동'(<한국근현대사 연구> 2005년 봄호)에 따르면, 이르쿠츠크파는 김립이 그 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고 주장했고, <김철수 친필 유고>에 따르면 그 돈은 이동휘와 김립의 대일 투쟁에 사용됐다.
김철수의 증언은 한인사회당이 1921년에 고려공산당으로 개편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해 위의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은 "1920년 말 이후 이동휘와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상해 임정의 개혁을 위해 진력하였다"고 한 뒤 "모스크바 자금을 고려공산당 조직과 활동 자금으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금 사용에 대해 크게 격분한 인물이 백범 김구다. <백범일지>는 김립이 그 돈을 공산주의운동에도 썼지만 가족들과 첩에게도 썼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얼마나 확산됐는지는 꼿꼿한 선비의 대명사로 통하는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심산 김창숙은 1951년경에 쓴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이동휘와 김립을 가리켜 "두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 뒤 "김립은 창녀를 끼고 상해의 조계에 숨어"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 같은 부정적 인식은 임시정부가 김립을 공격하는 상황으로 귀결됐다.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은 "상해 임정은 1922년 1월 26일자로 국무총리 신규식 등 각원(閣員) 명의로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라며 "보름이 채 안 된 2월 10일 아침 김립은 오면직·노종균 두 한인 청년에 의하여 피살되었다"고 서술한다.
오면직·노종균은 김구가 파견한 청년들이다. 김립의 행위는 임시정부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그 돈을 고려공산당을 통한 독립운동에 썼다 해도 그와 이동휘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독립운동권의 분열을 촉진시키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국가보훈부가 김립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시비를 걸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역사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한 김립의 독립운동은 돈 문제로 인해 빛이 바래졌지만, 그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소련·중국과의 협조 속에 전개되던 시절을 반영한다. 그 시절에 독립운동진영은 김립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소련의 도움을 받았지만, 언제나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다. 소련 정권 역시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고 조동걸 국민대 교수의 <선열의 길과 유적>은 소련 정권이 러시아 내 한국인들의 지원을 받은 사실을 거론하면서 "혁명군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고 토지 분배를 외치고 있어 한인 동포와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립 사건은 그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한국 독립운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진영 내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매개로 상하이에서 뭉쳤다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이다.
이 사건은 '한미일 대 북중러'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한러중 대 일본의 잣대를 대야만 이해할 수 있다. 소련 자금을 받지 못해 김립을 공격한 임시정부와 김구의 행동은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과의 제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윤석열 정권이 내세우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는 오늘날의 동북아 정세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언정 위와 같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방해만 된다. 이런 관점을 고집하면 홍범도 같은 피해자만 양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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