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은 한민당 지도자이자 호남 재벌인 인촌 김성수다. 김성수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또 다른 한민당 지도자는 장덕수다.
'이승만 자택' 혹은 '이승만 사저' 하면 서울 대학로 주변의 이화장이 떠오르지만, 이화장은 귀국 2년 뒤인 1947년 10월 18일에 입주한 곳이다. 1945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 짐을 푼 이승만은 8일 뒤 서울 성북구 돈암장으로 이사했다가 1947년 8월 18일 서울 용산구 마포장으로 옮겨갔다. 그랬다가 두 달 뒤 이화장에 들어갔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살도록 도와준 인물이 바로 장덕수다. 1970년 광복절에 발행된 <조선일보> 5면 특집기사는 "돈암장은 한민당 총무였던 장덕수씨가 제자였던 장진영씨를 설득, 이 박사의 거처로 삼았었다"라며 이 집의 규모가 4천여 평이었다고 설명한다. 사랑채만 해도 40미터나 됐다고 한다.
장덕수는 이승만이 고급 저택에 2년간 거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같은 물질적 제공은 친일세력과 이승만의 제휴를 수월케 만들었다. 김성수와 더불어 장덕수도 이승만을 친일파들의 세계로 인도한 핵심 인물이다.
이승만은 그 시절 사람치고는 국제 경험이 많았다. 이 점에서는 장덕수도 뒤지지 않았다. 장덕수는 이승만보다 19년 뒤인 1894년 12월 10일 이승만의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과 서해 바다의 중간쯤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한 장덕수는 그 뒤 해외 곳곳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16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에는 오리건주립대학에 들어가고 1924년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중인 1929년부터는 런던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런 뒤인 1936년에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이승만이 '이 대통령'보다 '이 박사'로 더 많이 불린 것은 박사가 귀했던 시절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런 시절에 장덕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일본에서도 공부했으니, 국제 감각에서는 이승만에게 뒤질 게 없었다.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장덕수도 한때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한국대표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해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여운형의 신한청년당과 함께한 인물이 당시 25세인 장덕수다.
33세인 여운형은 이를 계기로 청년 지도자로 부각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이 되고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도쿄를 방문하게 됐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한국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벌인 연출이었다. 이때 여운형의 일본어 통역이 되어 동행한 인물이 장덕수다.
그 뒤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 되고 부사장이 되고 임시정부 재무부 재무위원 등이 된 장덕수는 193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원을 졸업한 뒤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덕수 편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같은 해 12월 미국에서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했다"고 한 다음에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순회강연회에서 황해도 지역 연사로 순회강연 활동을 했다"고 설명한다.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 영입에 주력했다. 민족주의운동을 했던 홍난파는 그해 11월에 친일파로 전향했고, 이광수는 이듬해 11월에 전향했다. 이런 시기에 장덕수는 비교적 일찍 친일로 전향하고 전쟁 중의 시국 강연에 나섰다. 그는 그 시절의 '뉴'친일파였다.
해방 이후 또다시 변신한 장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