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4일, 20대 총선이 끝난 다음날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국민의당 마포구 당사에서 선거상황판에 당선된 후보의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의 공동 1위는 총 210석 중에서 각각 24석을 차지한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이고, 3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14석), 4위는 대한청년단(10석)이었다. 요즘 말하는 제3지대는 거대 양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1위와 2위의 의석 비율이 각각 11.4%였던 제2대 총선에서 3위와 4위를 기록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청년단은 지금 언급되는 제3지대라고 보기 힘들다.
유신체제 전년도에 치러진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113석)과 신민당(89석)에 뒤이은 공동 3위는 각각 1석인 국민당과 민중당이다. 양대 정당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이런 사례 역시 요즘 회자되는 제3정당과 거리가 멀다.
외형상으로는 제3지대가 세력을 확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회의원이 따로 있고,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국회의원이 따로 있었던 유신체제하의 1973년 제9대 총선이 그랬다. 이때 민주공화당과 유정회는 각각 73석, 신민당은 52석, 민주통일당은 2석, 무소속은 19석을 획득했다.
신민당이 제3지대를 형성한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박 정권의 공천을 받아 지역구에서 출마한 여당 의원들은 공화당에, 박정희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유정회에 속했다. 그래서 공화당과 유정회는 사실은 한 몸이었고, 신민당은 실질적인 제2당이었다. 이 선거와 관련해서는 제3지대를 운운할 여지가 없었다.
전두환 제5공화국 하의 1981년 제11대 총선은 민주정의당(민정당) 151석, 민주한국당(민한당) 81석, 한국국민당(국민당) 25석 등의 결과를 낳았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민정당 2중대였다. 그래서 이때와 관련해서도 제3지대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것저것 다 떼어놓으면, 남는 것은 1963년·1988년·1992년·1996년·2016년의 다섯 사례다. 1963년 제6대 때는 총 175석 중에서 민주공화당이 110석, 민정당이 40석을 획득한 가운데, 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이 각각 14석·9석을 차지했다. 1988년 제13대 때는 299석 중에서 민주정의당이 125석, 평화민주당(평민당)이 70석을 갖고,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각각 59석 및 35석을 차지했다.
1992년 제14대 때는 민주자유당(민자당, 149석)과 민주당(97석)에 이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31석을 차지했고, 1996년 제15대 때는 신한국당(139석)과 새정치국민회의(79석)에 이어 자유민주연합과 민주당이 각각 50석·15석을 확보했다. 2016년 제20대 때는 더불어민주당(123석)과 새누리당(122석)에 이어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38석을 획득했다.
1963년 11·16 총선은 '4대 의혹 사건'이라는 일련의 부정부패로 인해 군사정권 2인자인 김종필이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는 등의 정치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거기다가 총선 1개월 전의 10·15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및 친일 이력이 부각돼 정권의 위기가 가중된 뒤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3정당들이 표를 많이 얻었다.
집권세력이 위기를 겪고 제3정당이 부각되는 양상은 6월항쟁 직후인 1988년과 촛불혁명 직전인 2016년은 물론이고, 집권당의 분열이 두드러진 1992년(노태우 정권)과 1996년(김영삼 정권)에도 있었다. 이는 제3지대의 성공이 집권 세력에 대한 유권자의 평가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한다. 여당이 정치를 못 한다는 인식의 확산이 제3정당에 이롭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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