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민을 향한 제국의 목소리

첫 번째 조선총독부 관료 연설 음반 확인

검토 완료

이준희(songcing)등록 2024.02.19 14:16
20세기 전반 가장 중요한 소리 기록 매체로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던 SP음반에는 다양한 내용이 녹음되었다. 대중음악이나 전통음악 같은 여러 분야 음악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것은 물론이지만, 그 밖에도 극 음반이 10% 정도 되었고, 낭독이나 연설 음반도 드물게 만들어졌다.
 
1945년 이전에 발매된 음반 가운데 한국인의 연설이 녹음된 것은 두 가지가 알려져 있다. 하나는 1927년에 나온 이상재(李商在)의 <조선 청년에게>이고, 다른 하나는 1936년에 나온 손기정(孫基禎)의 <우승의 감격>이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감을 녹음한 손기정의 음반은 연설이라 하기에 조금 애매한 감도 있지만, 이상재의 <조선 청년에게>는 최초이자 사실상 유일한 연설 음반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1926년 11월 이상재의 녹음 소식과 사진을 전한 신문 기사 ⓒ 조선일보

 
이상재는 1927년 3월 29일에 일흔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선 청년에게> 녹음은 넉 달쯤 전인 1926년 11월에 이루어졌다. 신문 광고로 보면 1927년 7월에 음반이 발매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재 타계 직후에 이미 비공식적으로 유통된 음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4월 7일 영결식에서도 이상재가 남긴 음반을 참석자들이 함께 듣는 순서가 마련되었다.
 
녹음과 비공식 공개, 공식 발매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몇 달에 걸쳐 이루어진 이상재 음반은 그동안 한국 최초 연설 음반으로 공인되어 왔다. 그런데 여기에 논란을 더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최근 확인되어, '최초'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생겼다.
 
문제의 자료는 지난 해 경매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1929년 4월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히코키(ヒコ-キ)레코드 총목록이다. '히코키'는 비행기를 뜻하는 일본어이며, 히코키레코드의 상표 도안이 비행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일본 고도(合同)축음기주식회사에서 제작한 히코키레코드는 일본에선 종류나 발매량이 제법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비행기표 조선 소리반'이라는 이름으로 1926년 7월 초에 단 한 번 소량 발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코키레코드 총목록 표지와 '조선 레코드' 소개 면 ⓒ 이준희

 
당시 광고를 보면 H1~H5 번호가 붙은 음반 다섯 장의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히코키레코드 총목록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광고에는 보이지 않는 음반번호 H6, 여섯 번째 비행기표 음반이 총목록 '조선 레코드' 대목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서 발매된 첫 번째 연설 음반일 수도 있는 <朝鮮産業第一主義に就て(조선 산업제일주의에 관하여)>이다.
 
아다치 후사지로(安達房次郞 또는 安達房治郞)가 녹음한 <조선 산업제일주의에 관하여> 음반이 언제 발매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단 1926년 7월 광고에는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뒤에 발매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때 발매가 되기는 했지만 광고에만 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서는 광고 아닌 다른 자료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아다치 후사지로의 신문 기고문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1926년 7월 초 신문에 게재된 '비행기표 조선 소리반' 광고 ⓒ 매일신보

 
아다치는 1924년 연말부터 1926년 6월까지 조선총독부 상공과장을 지낸 인물로, 1930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1935년 7월 <경성일보>에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의 산업제일주의>라는 글을 기고했다. 시모오카 총감은 1924년 7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제4대 조선총독부 정무(政務)총감을 지낸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이며, 취임 직후부터 산업제일주의를 강력히 주창했고, 관련해서 조선의 쌀 생산량을 늘려 일본에 공급하는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시모오카 정무총감 밑에서 약 1년 동안 상공과장을 지낸 아다치는 시모오카의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 중요한 실무자였고, 그러한 배경에서 10년 전을 회고하는 1935년 기고문을 썼다.
 
히코키레코드 관련 내용은 기고문 말미에 보이는데, 상공과장 재임 당시 아다치는 산업제일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노래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무렵 한창 유행하고 있던 일본 신민요 <오료쿠코부시(鴨綠江節))> 곡조에 맞춰 '朝鮮産業の歌' 가사를 만들고, 조선 기생들에게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비행기표 조선 소리반 광고에 음반번호 H1로 소개된 기생 이난향(李蘭香)의 노래 <조선산업가>가 바로 그 작품인 것으로 보이며, 제목 앞에 '조선총독부 상공과 추천'이라는 문구가 붙은 이유도 아다치의 기고문으로 이해할 알 수 있다. 전 정무총감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현 상공과장이 직접 가사를 쓴 노래이니, 당연히 총독부 추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다치 후사지로의 1935년 기고문 일부 ⓒ 경성일보

 
다만 아다치 기고문에는 노래 이야기까지만 있고 본인이 직접 <朝鮮産業第一主義に就て>를 녹음한 것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래도 <조선산업가>를 만든 그의 상공과장 재직이 1926년 6월까지였음을 보면, 1926년 7월 초 발매 히코키레코드 제작에 아다치가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고, <朝鮮産業第一主義に就て>도 다른 히코키 음반들과 마찬가지로 7월에 발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리에서 물러난 전직보다는 현직 상공과장이 산업제일주의 홍보 음반을 녹음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아다치는 상공과장 재임 당시 음반 녹음 외에도 산업제일주의 강연을 종종 했던 기록이 보인다. 또 상공과장에서 물러나 개간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1926년 9월에는 <매일신보> 지면에 그의 강연 내용이 열 차례에 걸쳐 연재되기도 했다. 아마도 관료 치고는 말솜씨가 꽤 좋은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음반 녹음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산업제일주의를 주창한 시모오카 정무총감은 재직 중인 1925년 11월에 위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음반 녹음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35년 당시 아다치 후사지로의 모습 ⓒ 대만신문사

 
아다치의 음반은 아마도 1926년 봄쯤에 녹음되어 7월 초에 발매된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추정이 맞다면 앞서 본 이상재 음반보다 녹음과 발매가 모두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이 일본어로 녹음하기는 했지만, 조선어 음반 번호체계로 속한 '조선반(盤)'으로 발매되었으므로, 한국 음반 역사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朝鮮産業第一主義に就て>이다.
 
이처럼 조선총독부 관료가 조선 대중을 청취자로 설정해 녹음한 연설 음반은 이제까지 두 건이 확인된 바 있다. 1933년에는 제8대 정무총감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淸德)가 녹음한 <農村更生えの途(농촌 갱생의 길)>가 시에론(Chieron)레코드에서 발매되었고, 1941년에는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녹음한 <銃後國民訓(후방 국민에게 내리는 훈화)>이 오케(Okeh)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그리고 히코키레코드 총목록 공개를 통해 세 번째이자 가장 시기가 앞서는 아다치 후사지로의 음반이 추가로 또 확인되었다.
 

이마이다 정무총감과 미나미 총독이 녹음한 연설 음반 ⓒ 이준희

 
이마이다 정무총감과 미나미 총독의 음반은 실물이 남아 있으므로 그 내용도 대략 알 수 있으나, 아다치 상공과장의 1926년 음반은 아직 목록으로만 알 수 있을 뿐 실물이 현존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당시는 녹음에 마이크를 아직 사용하지 않던 때라, 차후 음반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음질 문제로 내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반으로는 세 건이 확인될 뿐이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연설은 라디오 방송이나 현장 강연을 통해서도 빈번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어를 듣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던 조선 대중에게 그러한 제국의 목소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노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있었음은 이번 히코키레코드 자료를 통해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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