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노래>는 '군가 음반 1호'가 아니다

앞선 음반 확인, 25일에 감상회 개최

검토 완료

이준희(songcing)등록 2024.06.19 15:48
모든 최초는 가변적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더 앞선 것이 나타날 수도 있고, 관점을 달리하면 또 다른 최초가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대개 최초에 흥미를 보이기 마련이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최초에 대한 소개와 논의는 신중해야 한다. 더구나 언론이라면 누군가 던져 주는 '최초 거리'를 그냥 덥석 받아써서는 안 된다. 당연히 면밀하게 검증해야 하고, 그럴 자체 역량이 안 된다면 최소한 다른 견해가 있는지 확인은 해 봐야 한다.
 
지난 2008년 6월, 58년 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25일을 앞두고 언론이 혹할 만한 보도 자료가 하나 던져졌다. 신나라레코드에서 '군가 음반 1호'를 발굴했고, 거기 수록되어 있는 곡이 <6·25의 노래>라는 것이었다. 6월 25일 저녁 뉴스로 써먹기 딱 좋은 소재였고, 실제로 연합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가 신나라레코드에서 제공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 소개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므로, 소개는 당연히 오보가 되고 말았다.
 

1955년 3월 이후 발매된 <6·25의 노래> 음반 딱지 ⓒ 이준희

 
'군가 음반 1호'라고 주장된 1950년대 SP음반에 <6·25의 노래>가 수록된 것은 맞다. '0001'이라는 번호가 찍혀 있으니 최초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신나라레코드의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음반 자체에 발매 시점을 알려 주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어림잡아 그렇게 추정했을 텐데, 자세히 뜯어보면 1955년 3월 이후에 발매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또 음반에 있다.
 
보도 내용대로 <6·25의 노래> 수록 음반은 국방부 정훈국의 의뢰를 받아 민간 음반회사가 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신나라레코드의 설명은 거기까지였고, 그 음반회사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음반 발매 시점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서 제작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 정보는 음반 딱지 테두리 하단에서 볼 수 있다.
 
한글과 한자만 있는 딱지 다른 부분과 달리 작은 영문으로 쓰인 테두리 하단 내용은 'MADE BY KOREA RECORD MANUFACTORY SEOUL KOREA'이다. 'KOREA RECORD MANUFACTORY', 즉 고려레코드제작소에서 음반을 제작했다는 뜻이다. 고려레코드제작소는 통상 유니버살(Universal)레코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음반회사로, 1954년 9월에 첫 음반을 발매했다.
 

유니버살레코드의 상호 변경 내용이 있는 1955년 3월 광고 ⓒ 경향신문

 
고려레코드제작소와 유니버살레코드가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는 정보는 1955년 3월에 나온 광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고를 보면 '유니버살레코드제작소는 금반(今般) 상호를 고려레코드제작소로 변경하고 계속 좌기(左記)와 같은 상표로서 발매'하게 되었다는 안내가 있다. 정리하자면, 1954년에 설립된 유니버살레코드가 1955년 3월에 상호를 변경하면서 상표는 '유니버살'과 '코리아(고려)' 두 가지를 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4년 9월에 발매된 유니버살레코드의 첫 음반 딱지 표기는 1955년 3월 이후 음반과 달리 'MADE BY YUNGCHANG IND. CO. LTD SEOUL KOREA'로 되어 있다.
 
국방부 정훈국의 의뢰를 받아 유니버살레코드에서 제작한 음반번호 0001 <6·25의 노래>는 이처럼 1955년 3월 이후에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군가 음반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나라레코드의 추정과 같이 1950년대 초반에 발매된 것은 아니라도 '군가 음반 1호'가 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훨씬 앞선 1949년에도 이미 군가로 표현된 노래가 수록된 음반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었다.
 

럭키레코드 1949년 10월 신보 광고 ⓒ 경향신문

 
1949년 4월에 가수 현인의 데뷔곡 <신라의 달밤>을 발매해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킨 럭키(Lucky)레코드는 기세를 몰아 계속해서 후속작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로 <육탄 십용사 UN고지 용전가>와 <용사의 노래>가 함께 수록된 음반이 10월에 발매되었다. 이들 곡에 대해 잡지 <삼천리> 1949년 12월호에서는 '해방 후 이 땅에서 처음 계획된 군가 레코드'로 소개했다.
 
그런데, <육탄 십용사 UN고지 용전가> 가사와 곡조를 들어 보면 일반적인 군가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럿이 함께 힘찬 분위기로 부를 수 있게 만들어지는 통상적 군가와 달리, 비장한 선율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가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노래 자체가 음악극 <육탄 십용사>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무대 공연용이었기 때문이며, 럭키레코드의 음반은 음악극 <육탄 십용사>의 대중적 인기를 반영해 이후 제작된 것이었다.
 
1949년 5월 4일, 당시는 남한 영역이었던 개성 송악산에 침투한 북한군을 남한군이 격퇴하는 가운데 서부덕 등 국군 열 명이 육탄공격을 감행해 순국했다는 이른바 '육탄 십용사' 사건이 일어났다. 석 달 뒤 8월 6일에는 그 일을 극화한 추도 공연 <육탄 십용사>가 서울 극장 시공관에서 막을 올렸는데, <육탄 십용사 UN고지 용전가>와 <용사의 노래> 바로 그때 무대에서 불렸던 곡이다. 노래의 작사, 작곡자는 음악극 <육탄 십용사>의 원작자와 음악 담당자이기도 했던 현역 중령 이영순과 작곡가 박시춘이었다.
 

음악극 <육탄 십용사> 공연 광고 ⓒ 경향신문

 
<육탄 십용사 UN고지 용전가> 등이 통상적인 군가와 다른 경로로 만들어진 노래이니, <6·25의 노래>를 그래도 1번으로 볼 수 있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1951~52년에도 대구 오리엔트(Orient)레코드에서 <육군가>, <행군의 아침>, <제2국민병의 노래> 등 여러 군가 음반이 발매되었고, 1954년에는 스타(Star)레코드에서도 <승리의 노래>, <날려라 해병대기> 등 군가 음반이 나왔다. 국방부 정훈국 의뢰 음반 <6·25의 노래>는 그 다음 순서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다.
 

1951년에 발매된 군가 <행군의 아침>과 1954년에 발매된 군가 <날려라 해병대기> 음반 딱지 ⓒ 이준희

 
전쟁이 바로 일상 곁에 있었던 70여 년 전과 달리, 오늘날 군가의 의미와 위상은 많이 축소되어 있는 편이다. 하지만 군가가 군대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는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기억은 '최초'에 혹하는 일시적 호들갑이 아니라 차분하고 신중하게, 그리고 엄정하게 조사하고 평가하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다. 대한민국 첫 번째 군가 음반 관련 오보에서 얻을 수 있는 그나마의 교훈이다.

전쟁 발발 74년이 되는 오는 6월 25일에는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이상 살펴 본 대한민국 초창기 군가들을 당시 축음기 음반 소리 그대로 들을 수 있는 감상회가 열릴 예정이다. 옛 가요 사랑 모임 유정천리에서 마련한 감상회에서는 <6·25의 노래>를 비롯해 그보다 앞서 발매된 <육탄 십용사 UN고지 용전가>, <행군의 아침>, <날려라 해병대기> 등도 함께 들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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