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외우기가슴 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시구는 한 줄기 두 줄기 번져가는 빛이 됐다.
김미래/달리
문득 김경미 시인의 시 '식사법'이 떠올랐다. 먹어야 사는 우리이기에 식사법은 어쩌면 우리의 사는 법일 수도 있다. 시인은 이렇게 시를 시작한다.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 그래야 한다면서 설탕 같은 달콤한 맛이 없더라도 끝까지 묵묵히 먹는 인내를 가지고, 인생의 고통은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고 성실 그 하나로 밀고 나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생이 규칙적인 좌절을 주더라도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 먹듯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고도 했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부엌 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물리적 빛에 더해 내가 외운 시가 보태준 심리적 빛이 내 머릿속에 부엌 창을 그려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시를 외우게 된 것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친구의 뇌세포를 살려보자는 시도였다. 간단한 시라도 함께 외우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는데, 안타깝게도 내 노력도 부족하고 주변 사람들 반응도 모자라서 중단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시집 하나 제대로 읽지 않던 내가 무려 10편의 시를 외우고 있었다. 신기했고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 반복해서 중얼중얼 외우다 보니 오히려 내가 점점 나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시에는 숨은 빛이 있었다. 꼭꼭 시인이 숨겨둔 빛도 있지만, 독자가 읽고 또 읽으면서 발견하는 다른 빛도 있었다. 그래서 명확하지도 않고, 뚱딴지같은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게 시의 매력인 것 같았다. 그동안은 이런 이유로 시를 멀리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같은 이유로 내가 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를 더 외웠다. 여전히 좋았다. 아는 시가 없어서 교과서 시를 찾고 친구들에게도 추천을 부탁했다. 왠지 내 뇌가 향상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언했다. 뇌세포 살리기 프로젝트, 시 100편 외우기! 일주일에 서너 편을 꾸준히 외웠다. 까먹고 또 까먹어서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매일 매일 중얼거렸다. 화장실에서도 중얼거리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중얼거리고, 멍하니 앉아서도 중얼거리고, 문득 잠이 깨어 이불을 끌어당기면서도 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시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빛을 전해줬다. 물리적인 빛이 내 시야를 환하게 밝혀줬다면, 시를 외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심리적 빛은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줬다.
밥을 다 먹을 때쯤 나는 기분이 좋아졌고, 짜증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괜스레 웃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을 아내와 얼굴 마주 보고 외우기가 쑥스러워서 아내와 몇몇 친한 친구들이 들어있는 카톡 방에 나태주 시인의 시 '선물'을 외워서 올렸다.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
살짝 닭살도 돋았지만, 어찌 보면 그 시를 읽는 모두가 당신 아닌가. 기분이 상쾌했다.
이훤 시인의 시 '군집'에서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외면해 제대로 잉태되지 못한 감정이 '우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우울이 내밀하게 일으키는 데모도 이따금 정당한 것이라고 했다.
내 생각엔 우울의 전 단계인 짜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가 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이 짜증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 곪고 곪아서 터져 나오는 내면의 은밀한 데모일지 모른다.
신이 아닌 한 우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고 안아줄 수 없다. 감정이 곪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다. 아무리 숨어있다고 해도 그건 반드시 치료해야 할 상처다. 그런데 짜증이 그걸 곪아서 터지게 만든다.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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