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설날

우울증의 터널을 벗어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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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영(cyyoun)등록 2024.02.13 08:49
2024년 설날에 있었던 일-우울증을 극복한 아들
 
설날이라 대전에서 둘째 아들이 왔다. 올해 30살로 다섯 번째 대학교인 한남대 심리학과에 입학한다. 서울에 살았는데 대전으로 얼마 전 이사했다. 이 말만 들으면 굉장히 학구파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20대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대경대에 입학했다. (하도 많이 입학하여 이젠 과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후 휴학했다. 아니 나중에 복학하지 않았으니 자퇴한 셈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에 굉장히 반대했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퇴하고 울산 집으로 내려왔다. 그것이 그의 방황의 시작이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엄마와 매일 다투었다. 심지어는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아들이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 말이 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에 분노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무서워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찜질방에서 우리 부부가 잠을 자기도 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참다못한 어느 날 아내에게 오늘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고는 아들과 함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넌 왜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냐? 오늘 아빠랑 술 한잔하자."
소주 두 병을 나발 불고 나자 나도 취기가 어렸다.
"너 오늘 나랑 같이 죽자."
그렇게 말하고는 아들을 때리려했다. 아들은 피해 도망갔다. 아들을 찾으러 나오니 집 안에 아들은 숨어있다가 문을 잠갔다. 화가 난 나는 삽으로 유리창을 깨었다. 방범창이 되어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경찰이 왔다.
"싸운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그냥 가세요. 아들과 트러블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돌아갔다. 하지만 난 화가 풀리지 않아 계속 문을 열라고 하고 아들은 버티고 한 시간 정도 실랑이가 계속되는 중에 경찰이 다시 왔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1층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내가 와서 구급차를 불러 아이를 울산대 병원으로 데려갔다. 울산대 병원에서는 아이의 병명을 충동조절장애, 우울증, 경계성 장애 등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병명을 말했다.
"아이는 병에 걸렸습니다. 전두엽 이상으로 호르몬 분비가 정상적으로 되지 못해 발생한 병입니다. 아마 평생을 병원에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심해지면 조현병으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입원부터 시키세요."
조현병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았고,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말은 미친 사람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참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비참한 생각이 들었을 때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인정했다. 아이의 행동은 병이다. 병의 증세가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자 아이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많이 반성했다. '아이가 저렇게 되도록 난 무얼 했던가? 암이란 병에 걸렸다고 왜 암에 걸렸냐고 욕하지 않는 것처럼, 우울증이란 병에 걸린 아이를 나무라지 말자.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주자.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괜찮다고 말해주자.'라고 다짐했다. 아이를 울산대 병원 폐쇄 병동에 한 달 동안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좋아했던 술을 끊었다.
퇴원 후 아이는 67kg 나가던 몸무게가 약의 후유증으로 100kg이 넘었다. 아이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환청까지 들렸다. 당시 군대 영장이 나와 부산 병무청에 함께 갔다. 아이는 군 면제를 받았다.
이후 아이는 울산과학대에 들어갔고 학교 근처에 원룸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1학년을 다 못 다니고 또 그만두었다. 그가 사는 원룸에 가보니 방이 쓰레기장보다 더 더러웠다. 그때 아이에게 말했다.
"괜찮다. 너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증거는 방이 깨끗이 정리될 때이다."
아이는 휴대전화로 충동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비가 100만 원 넘는 것이 반복되었다. 신발도 한 50켤레는 샀을 것이다. 옷 또한 100만 원 넘게 충동구매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을 내 명의로 바꾸고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걸어 결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나중에는 제2 금융권에서 비싼 이자로 500만 원이 넘는 돈을 대출을 하기도 했다.
화가 났지만, 참았다. 아이의 이러한 행동은 병의 증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아이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그래도 괜찮다."였다. 화가 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아이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이다. 아이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을 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이는 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타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오토바이 타러 가자는 말에 아이는 따라나왔다. 그래서 난 시간이 날 때마다 오토바이에 아이를 태우고 밀양으로, 정자로, 부산으로 다녔다. 심지어는 울산에서 서울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 간 것이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이 대학교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였다. 그리고 서울 원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도 역시 1년을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또한, 1천만 원 보증금 중에서 500만 원을 주인에게 받아 써버렸다. (월세를 더 주는 조건으로) 그래도 난 아이에게 "그래도 괜찮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에서 생활하는 아이의 뒷바라지 하기가 참 버거웠다. 아이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병의 증세라고 생각했다.
네 번째로 서울 폴리텍 대학에 들어갔다. 기술이라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지만, 이곳에서도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둘째가 27살 되던 해에 큰아이가 결혼했다. 아이는 결혼식에 참석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얼굴에 잔뜩 어둠이 묻어있다. 하지만 그 이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이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몸무게도 줄이기 시작했다. 100kg이 넘던 몸무게가 지금 80kg 초반 정도이다. 서울 아이의 원룸에 가니 집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방이 깨끗하면 아이 상태가 좋아진다는 것이.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다섯 번째 대학인 대전의 한남대에 입학한 것이다. 심리학과라 자신과도 잘 맞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 우리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심적으로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그리고 방송이나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죽도록 힘든 그 상황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심리적 갈등을 심하게 겪었기에 심리학과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전으로 이사 온 아이는 새로운 정신과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검사에서 우울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물론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약은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난 세월 아들과 우리 부부가 짊어진 커다란 짐 하나를 벗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아이는 외견상으로 정상이다. 그리고 충동적인 행동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정상적인 어른도 끊기 힘들다는 술을 끊은 지가 벌써 3년이 넘었고 담배도 끊었다. 예전에는 전화만 하면 싸우던 엄마와도 하루에 한 번씩 통화하며 깔깔거린다. 요즘은 역으로 되어 아내가 아빠의 험담을 아이에게 늘어놓는다. 그럴 때 아이는 "엄마, 아빠랑 이혼해버려."라는 말도 했단다. 섭섭하게.
이번 설날 서른이 된 아이는 정말 너무 다정하게 행동했다. 든든했다. '맞다, 저것이 원래 아이의 모습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의 기다림은 길었다. 하지만 우울증이란 병은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이 아니다. 단지 사랑으로 보듬고 기다려주면 나을 수 있는 병이다. 불치병은 없다. 단지 난치병이 있을 뿐이다.
예전에 아이가 한창 힘들 때 쓴 시가 '기다림은 곡선이다'이다. 늦게 피어도 피지 않는 꽃은 없다고 믿고 아이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시이다. 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곡선이다 1
 
 
기다리는 것은 둘러온다.
더욱 빛나기 위해.
 
각선미처럼,
둘러 와야 아름답다.
 
산길은 곡선이다.
산이 내어준 데로
걸음이 길을 만든다.
 
그대는 지금 더 아름답기 위해
느긋하게 걸어온다.
 
계절이 곡선인 것처럼
내 기다림도 곡선이다.
 
봄이 와 꽃이 피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대가 올 것이다.
 
늦게 피어도 피지
않은 꽃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돌아서 늦게 오는 만큼
그대는 더 아름다울 것이며
 
내 기다림도 더
아름다울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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