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병화가 그린 '명동 다방 지도'
국립현대미술관
1970년대 초반 다방의 중심은 커피가 아니라 마담과 레지였다. 문화인들이 모여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거리의 안식처'였던 다방의 본모습은 사라지고,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마담이나 레지가 달려와 차 주문을 요구하는 각박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다방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에서 사무실이 귀한 때였다. 쉽게 전화를 놓기 어려운 시절에 다방을 사무실 대용으로 쓰는 손님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다방에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마담이 "김 사장님 전화요," "이 사장님 전화요" 하면 대여섯 명이 일어나는 진풍경이 늘 벌어졌다.
1960년대 어느 순간부터 다방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동엔 이제 "다방다운 다방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렸다. 1940년에 서울역 앞에서 시작하여 해방과 함께 명동으로 이전한 후 문화예술인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오던 음악다방 돌체가 문을 닫은 것은 1962년이었다. 명동이 문화의 중심지에서 상업의 중심지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돌체 다방 운영자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일제시대에 엘리제 다방이 있던 유네스코 앞 골목에는 '모나리자'라는 다방이 있었다. '모나리자'는 6.25 직후 명동에서 가장 먼저 영업을 재개하면서 명동을 찾는 문화예술가들의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953년 백영수 화백이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이고, 명동백작이라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서 박인환, 김수영, 조병화, 서정주, 조지훈, 이중섭, 이해랑, 전혜린 등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다방을 들어서면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고, 마담은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어느날 '모나리자'의 꽃이었던 홍 마담이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단골들은 "모나리자도 시집간다"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서서히 다방을 지배하던 정은 사라지고 상혼이 앞서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시인 조병화가 "돈만 남은 명동"이라고 한탄하였던 것이 1966년이었다. 1969년 12월에는 세금 체납으로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받은 다방 명단이 신문 지상에 크게 발표되었고, 여기에 '모나리자'도 포함되었다. 결국 '모나리자'는 문을 닫았다.
다방을 소재로 한 석사학위 논문
변화하는 다방의 모습을 아쉬워하는 글이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하였다. <경향신문>은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제출된 이종철의 석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당시 다방의 분위기를 소개하였다. 1970년에 제출된 이 논문은 아마도 다방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사학위 논문일 것이다.
이 논문은 명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음료 소비 실태를 분석하였다. 이 논문에 의하면 당시 한 사람이 매월 사용하는 찻값은 20.4%가 500원 이하, 나머지 70%는 500~2000원 정도였다. 월평균 1000원 이상이었다. 다방 레지와 DJ의 월 소득이 1만 5000원 내지 2만 원이었다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찻값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은 상인과 무직자였다. 이들이 매월 찻값에 쓰는 돈은 평균 5000원에 달하였다. 상인은 모르겠지만 무직자에게는 가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당시 명동에서 소비자들이 다방을 찾을 때 고려하는 요소로 첫째는 분위기였고, 음료를 따라 다방을 선택하는 것은 25%에 불과하였다. 다방에 들어갔으나 앉지 않고 나오는 이유로 첫 번째는 '시끄럽다', 다음으로는 '공기가 탁하다', '레지가 불친절하다' 순이었다. 다방을 다시 찾는 이유로는 차 맛, 음악, 레지의 서비스 순이었다.
당시 유행의 하나는 외국어 사용이었고 다방의 명칭에서도 이런 유행이 반영되었다. 1960년대 들어 다방 간판에 외국어 사용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 논문은 이런 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분석하였다.
다방의 경우 한국어 간판이 좋다는 사람은 46%였고, 외국어가 좋다는 사람은 21.3%였다. 주점의 경우는 한글 간판 선호 42%, 상관없다가 37.3%, 외국어 선호 16.8%였다. 남자보다는 여자, 그리고 고소득자가 외국어 표기를 더 좋아했고, 나이가 많을수록 외국어 표기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방의 명칭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오산고등학교 국어교사 강헌규는 <국어교육>에 기고한 글에서 다방 명칭에 나타난 외래어를 분석하였다. 대전 지역의 다방 명칭을 보면 한글, 한글+한자, 한글+로마자 순으로 많았다.
1955년에 국어학자 이희승이 조사한 것과 비교하면 한글이나 한자로만 된 명칭은 감소하고 혼용은 증가하였다. 서울의 경우에는 한글, 한글+영자, 한글+한자, 한글+한자+영자 순이었다. 외래 문화에 보다 개방적이었던 서울의 경우 지방보다 영문 명칭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다방에서 들려주는 음악에 관해서는 외국 음악에 대한 선호가 높았고, 외국 음악 중에서는 재즈가 48.5%, 가벼운 고전음악이 38.2%, 정통 고전음악은 13.3% 순으로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문의 결론에 따르면 당시 명동 지역 다방은 대형화 추세였고, 주로 외국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으며, 무뚝뚝한 레지가 불친절한 서비스를 일삼는 곳이었다.
다방의 아늑한 정취 사라져간 1970년대 초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