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 풍국신사(豊國神社)의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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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교(cuettop)등록 2024.02.03 19:36
오사카 단체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다. 이틀간 묵었던 숙소 1층 식당에서 조식 뷔페를 먹고 짐을 챙겨 버스에 실었다. 오사카성을 돌아보고 면세점과 쇼핑몰 두 군데를 거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가이드의 안내를 듣는 동안 버스가 출발했다.
날씨는 좋았던 어제와 달리 구름이 잔뜩 끼고 빗방울이 드문드문 차창에 부딪힌다. 하늘도 내 마음 같은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데 문득 조선 통신사 김성일과 황윤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사카성은 풍신수길(豐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건설했다. 그곳을 조선인으로는 김성일과 황윤길이 처음 방문한다. 그다음 해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선은 폐허가 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땅이 되었다.
 
수길은 길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전에 조선은 바닷길이 멀고 험하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했었다. 이번에는 대마도주가 길 안내를 자청하면서 압박을 해왔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선조가 통신사 파견 조건을 제시한다. 1589년 8월 4일 선조실록의 기사다.
 
'2년 전인 1587년 2월 왜선 수십 척이 고흥 녹도 근처에 나타나 노략질하고 사람을 잡아갔다. 이 정해왜변을 일으킨 왜구와 이들을 안내한 조선인 사을포동(沙乙蒲同)을 잡아 보내고, 잡혀간 백성들을 돌려보내 준다면 일본의 화친 의도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통신사를 보내겠다.'
 
이 조건을 왜국이 수락하였고 통신사는 황윤길과 김성일로 결정된다. 그리고 1590년 2월 28일 왜구 두목 3명과 사을포동이 잡혀 와 선조는 인정전에서 이들을 처형하는 헌부례(獻俘禮)를 했다. 이어서 3월 6일 통신사가 서울을 떠났고, 왜국으로 갔다가 이듬해인 1591년 3월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를 거쳐 후쿠오카에서 배를 내렸다. 멀리 돌아가다 보니 두 달여가 지나서야 오사카에 도착하여 큰 절에 숙소를 정했다. 수길은 산동(山東) 출병과 궁실 수리를 핑계로 5개월 후에야 조선의 국서(國書)를 받았다. 당시 상황을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 사신은 가마를 타고 궁문(宮門)으로 들어갔다. 피리를 불어 선도(先導)하였으며 큰 마루 위에서 예(禮)를 행하였다.
수길은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눈동자가 빛이나 사람을 쏘아보았다. 사모(紗帽)와 검정 도포를 입고 방석을 포개어 앉았으며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셨다.
우리 사신이 좌석에 앉았으나 연회 도구는 없었다. 탁자 하나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에 술을 쳤는데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냈다. 술을 주고받거나 서로 예를 차려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으나 자리를 함께한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편한 복장에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 서성거리더니 악공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쌌다. 수길이 웃으며 시종을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나와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곁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였다. 사신 일행은 사례하고 나왔으며, 그 후로 다시는 수길을 만나지 못했다."
 
통신사 일행은 답서를 받아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바로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계빈(界濱, 사카이市)으로 물러 나와 한참을 기다려 답서를 받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조선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거만해서 여러 차례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수차례 고쳐 받아온 수길의 답서 내용은 어땠을까?
 
"일본국 관백(關白)이 조선 국왕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여러 번 읽었습니다. (……) 사람의 한평생이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지만 한 번에 뛰어넘어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풍속으로 4백여 주를 바꾸어 억만년 동안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제일 먼저 조정에 들어온다면 멀리 내다보는 것이 되니 가까운 우환이 없지 않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들어오는 무리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군영(軍營)으로 들어온다면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수길의 뜻은 명확했다. 이글을 보고도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지를 판단하지 못했을까? 돌아온 통신사 일행을 불러 선조가 물었다.
"수길은 어떻게 생겼던가?"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력과 지혜가 있어 보였습니다."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426년이 지났다. 수길이 죽자 왜군은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가려 했다. 조명연합군도 모두 순순히 보내주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막아섰다. 순천왜성에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카)의 돌아가는 길목을 막은 것이다. 그러자 조선에 왔던 왜군 대부분은 행장을 구하러 올 수밖에 없었고, 노량해전으로 치명타를 입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312년 후인 1910년 일본은 다시 돌아왔다.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고 36년간 통치했다. 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일본은 다시 물러갔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내부에서 친일과 반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오사카성에서 나오는 길에 수길의 신사(神社)를 보았다. 수길의 동상도 있었다. 일본의 107대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이 풍국대명신(豊國大明神)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신사를 세웠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수길의 출세 기운을 받으려고 참배도 하고 결혼식까지 한다고 한다. 신사(神社) 후문 근처에는 결혼식장 건물이 진짜 있었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 나오는데, 때 이른 매화가 꽃망울을 막 터뜨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타 매체에는 송고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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