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에 있는 대왕산 죽창의거 기념공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년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7집에 실린 역사학자 장성욱의 '일제 말기 경산 결심대의 강제동원 거부 투쟁'은 "(능금) 수익은 고스란히 일본인에게" 돌아갔다며 "여기에 더불어 자행된 각종 농업 침탈은 대왕산 의거 가담자에게 직접적인 저항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태에서 강제징용이 강화되자, 경산시 남산면에서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산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박재천과 김인봉이 강제동원을 거부하고 청년들을 탈출시키려는 논의를 시작하자, 29명이나 되는 마을 청년들이 집단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박재달이 제안하고 박재천·김인봉이 주도한 이 운동에 최외문·안팔십·이일수 등이 참여했다. 2022년에 <역사교육논집> 제81집에 수록된 김일수 경운대 교수의 '일제강점기 경산 지역 민족운동'은 이 청년들이 "일제에 충성하여 징용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어차피 죽은 목숨 일제에 항거하다 죽자"는 박재달의 제창에 호응했다고 대구지방보훈청의 <대왕산 죽창의거 항일운동>을 근거로 설명한다.
청년들의 첫 회합은 1944년 7월 5일 경산시 남산면 사월동의 참외밭 원두막에서 열렸다. 남곡리에 사는 최외문이 가담한 것은 7 8일 제2차 회합 때였다. 7월 15일 제3차 회합 때는 29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조직 명칭을 결심대(決心隊)로 정했다. 일제와 헤어질 결심으로, 싸우다 죽겠다는 결심으로 그런 명칭을 정했던 것이다. 그런 뒤, 군대식 체계를 구성했다. 대장 안창률과 부대장 김명돌 휘하에 3개 소대를 두고 정보연락대와 헌병들을 두었다. 박재달·박재천·김인봉은 정보연락대에 배치되고, 최외문은 제3소대장에 임명됐다. 안팔십과 이일수는 2소대에 배치됐다. 위 김일수 논문은 이들의 투쟁 방책을 이렇게 정리한다.
"참석자들은 대왕산을 탈출 장소 내지 은거지로 선정하고, 자신들이 거주할 막사를 지을 연장, 취사 도구를 준비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방어할 무기로 죽창을 만들기로 하였다."
대원들은 해발 615.7미터(현재 기준)인 경산시 남부의 대왕산에 막사를 짓고 죽창을 준비했다. 예전에 성곽이 있었던 이 산은 마을과 가까운 데다가, 경사가 심해 외부 침입자를 상대하기 좋았다. 돌과 바위가 많아 투석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30대 최만갑과 10대 최동식을 제외하면 나머지 27명은 전부 20대였다. 이런 청년들이 대왕산을 기반으로 무력항쟁을 각오했다. 경산군도 아니고, 남산면에서 29명이나 그런 결의를 했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증오가 얼마나 널리 확산돼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당시의 일본 군대와 경찰은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죽창과 돌을 들었다. 그것도 지리산 같은 데가 아닌, 자기 동네에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꽤 무모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무모하지 않았다.
이들은 죽을 결심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싸워서 이기겠다가 아니라 싸우다 죽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군경을 자극했다. 죽창과 돌을 들고 집 근처에서 일본 군경을 기다린 것은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징용·징병 되느니 그냥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산 청년들이 똑똑히 보여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