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하여

소설 <호프만의 허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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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정(arete)등록 2023.12.31 15:25
 <호프만의 허기>(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문학동네)는 인간의 행복을 사색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네덜란드인 팰릭스 호프만은 1989년 4월 공산국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사로 부임해 관저 다락방에서 전임자가 두고 간 철학 책 하나를 발견한다. 20년 넘게 불면증으로 고생해온 그는 잠 못 드는 밤을 그 책과 보내리라 작정한다.

호프만은 밤새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라는 스피노자 저서를 읽으며 입으로는 고급 술과 비싼 안주를 끊임없이 집어넣는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새벽하늘이 밝아오면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들을 게워낸다. 그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표상들, 즉, 부와 명예를 다 갖추었음에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인물이다. 왜 밤이면 잠을 잘 수 없는지, 왜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느껴지는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자기혐오에 빠져있다.

자본주의의 표상으로 보이는 미국인 프레디 맨시니 역시 공복감과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쉴 새 없이 먹는 인물이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셋을 낳아 남부럽지 않게 키웠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다. 샌디에고 부자동네에 수영장 딸린 대저택과 고급 차량들을 구비해 놓고 풍요로움을 누리지만 행복하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고 그런 느낌은 그에게 죄책감을 유발해 참을 수 없는 허기를 일으킨다. 그의 체중은 미국식 단위로 삼백 오십 파운드다. 결국 체중조절을 위해 물자부족 상태에 있는 공산권국가로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고육지책을 실행한다. 하지만 프라하 호텔에서 첫 밤을 보내던 중 끓어오르는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고 몰래 밖으로 나갔다가 비밀경찰에 포착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호프만이 불면증을 앓는 이유는 쌍둥이 딸들의 비극적 죽음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쌍둥이 딸 하나는 여덟 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또다른 딸은 20대 초반 불미스러운 일에 엮여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충격이 호프만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호프만은 책을 들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평온과 행복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 읽어 내려갔다. 마치 돌파구가 그 안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뤼흐 스피노자는 1632년 네덜란드로 망명한 스페인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철학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범신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1656년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파문선고를 받았다. 교회 장로들이 그를 회유했다. 교회 가르침을 따르면 거액의 연금을 주겠다고.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를 거절하고 개인교사, 렌즈가는 일 등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과 편안한 생활을 맞바꾸지 않은 댓가로 그는 정신적 자유와 지복을 누리며 다락방 구석에서 저서들을 집필했을 법하다.  

호프만이 프라하 대사로 부임한지 7개월 만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동서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동유럽 공산주의도 차례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동독인들이 서방의 백화점으로 몰려와 줄을 서서 쇼핑하는 TV장면을 보며 호프만은 물적 쾌락을 쫓는 인간들이 한심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보다 자기가 더 나을 건 없다. 호프만은 그 즈음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니까. 체코의 비밀첩보원이자 기자인 이레나 노바와 하룻밤 사랑을 나눈 것. 그 뒤로 고질적인 불면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그녀에게 더 집착하다 자국의 고급 산업기술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줄지어 쇼핑하는 동독인이나 육체적 쾌락을 쫓는 호프만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이를 감지한 본국에서 소환장이 날아오지만 호프만은 응하지 않는 대신 네덜란드 외진곳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몰래 숨어든다. 며칠 뒤 별장 정원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호프만을 발견한 네덜란드 외무부는 여론의 관심을 피하려 얼른 그의 명예퇴직을 승인하고 일을 마무리한다.

1989년 12월 마지막 날, 호프만 부부는 호텔 창가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감상한다. 새로 산 스피노자 책이 호프만 앞에 놓여있다. 호프만은 허기를 느끼며 새해 소망을 기도한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호프만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었을까? 자기 파멸 직전의 순간까지도 호프만이 스피노자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다. 스피노자 이전의 고대 그리스로 올라가면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가 나타난다. 길게 사는 것보다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철학자. 그에게 즐거운 삶이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평온한 삶이었다. 말이야 쉽지. 그런 삶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욕망을 잘 관찰해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피함으로써, 즉, 과도한 물질적 육체적 쾌락은 피하되 정신적 쾌락은 택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에피쿠로스를 이은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지성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지성을 '정신의 심장'에 비유했다. 몸속 심장처럼 정신의 심장이 박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행복에 이를 수 있단다. 무절제한 물질적 육체적 쾌락을 조종하고 규제하는 것은 지성의 힘이므로, 지성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무익한 일들을 삼갈 가능성도 그만큼 상승한다. 그 안에 완벽한 행복이 있다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지성이라.... 지성에 대한 세밀한 고찰이라 할 만큼, 지성에 대해 속속들이 나열한 스피노자의 저서 <지성의 개선 및 지성을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논고>는 수학적 공리를 논증하는 수학책인지 아니면 철학책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절제한 쾌락을 쫓아 비틀거리던 소설 속 인물들, 가령 팰릭스 호프만이나 프레디 맨시니 같은, 흔하디 흔한 세상의 문외한들을 따라 읽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어렵게만 보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눈앞에 환히 드러나는 느낌이니까. 이 경우 스피노자는 나에게 교양이 아닌, 위안으로 다가온다.

<호프만의 허기>를 읽다 12월 한 달도 훌쩍 지났다. 오늘은 2023년의 마지막 날이다. 팰릭스 호프만의 기도를 떠올리며 나의 새해 소망을 간단히 적어본다.

'새해에는 내게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불러오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리라. 아울러, 내게 슬픔을 유발하는 모든 것을 불식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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