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홍
자료사진
그런데 여운형에게는 '이중 서훈'이 아닌, 가슴 아픈 진짜 '약점'이 있다. 여운형보다 다섯 살 적은 동생인 여운홍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여운홍 편은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1942년 12월에 조선임전보국단의 '미·영 타도 대연설회'에서 발언하고, 1942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인 매일신보사의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하고, 1943년 11월에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서울 종로에서 벌인 가정방문 행사에 참여한 일 등을 열거한다.
이 외에 친일 기고 활동도 있었다. 1942년 2월호 <조광>에 기고한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 - 신성한 의무'에서 "대동아전쟁은 숭고하고 위대한 목적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라며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금액이 많지는 않을지라도 대가 지급이 따르는 기고 활동도 했다. 친일재산이 발생하는 수익성 부역행위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인할 길이 없는 친일파다.
여운홍은 여운형에 관한 역사 서술에 자주 등장한다. '형을 따라다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정도다. 여운홍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운형의 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형의 활동을 열심히 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인 여운형은 21세 때인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강연의 요지는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나랏빚을 갚자'는 것이었다.
이때 16세였던 여운홍은 형을 위해 모니터링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이기형의 <여운형 평전>은 "여운홍은 형님의 연설을 들은 청중의 동향을 알아보았고, 잘된 점과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었다"고 설명한다. 연설문을 작성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이런 모습은 여운홍의 이후 삶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여운홍은 형의 항일운동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도 직접 이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열린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한국 대표단에 김규식과 더불어 28세 된 여운홍이 있었다.
이때 여운홍은 독립청원서 작성도 담당했다. 김동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의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는 여운홍이 1949년 8월 25일에 작성한 호머 헐버트 추모문을 근거로 "헐버트와 여운홍은 1918년 11월 16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만나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 문제가 상정될 것으로 보고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둘이서 밤을 새우며 기초하였다"고 기술한다.
원리원칙 없는 행보...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