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위키미디어 공용
1875년 강화도에서 군사 도발을 일으키고(운요호 사건) 이를 발판으로 조선 경제를 예속시킨 일본은 1894년에 반봉건을 기치로 하는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국민과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동원했다. 조선 정부는 이 군대를 거부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고종시대사> 제3집에 따르면, 음력으로 고종 31년 5월 5일(양력 1894년 6월 8일) 외교부장관인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는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일본임시대리공사에게 "파병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조회문을 보냈다.
반군인 동학군 역시 일본군의 상륙을 반대했다. 전주성을 점령하고 승기를 잡은 동학군이 이 성을 비워주면서까지 정부군과 휴전한 것은 반봉건보다 반외세가 더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처럼 동학군과 정부군 어느 쪽도 일본군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위 조회문 발송 다음 날에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제압한 뒤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그런 다음, 동학군을 진압해 조선 민중의 항일 에너지를 짓눌렀다.
일본군은 동학군과 정부군 양측이 다 거부하는데도 조선에 들어왔다. 그래서 개입이니 파병이니 출병이니 하는 용어가 개입될 여지가 희박하다. 결국 이때의 침공이 을사늑약과 국권침탈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침공에 맞선 사람들은 항일투사 혹은 독립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제2대 동학교주인 최시형이다. 그는 스승인 최제우를 뒤이어 동학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만 기여한 게 아니었다. 일본군이 침공한 뒤에는 동학 교단이 항일투쟁에 나서도록 만드는 데도 이바지한 인물이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 조직은 남접으로 불린다. 이들은 정치적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다. 반면,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주류세력은 북접으로 불린다. 이들은 정치보다는 종교적 입장을 우선시했다.
최시형은 반봉건 성격을 띠는 전봉준의 제1차 거병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다. 초대 교주 최제우가 정부의 탄압으로 처형된 일을 가까이서 경험한 그는 교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가급적 기피했다.
그는 반외세 봉기인 제2차 거병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한양 조정이 항일 봉기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뒤에는 태도를 달리했다. 그를 비롯한 북접 지도부는 그해 음력 9월 11일자(양력 10월 9일자) 통문을 통해 교인들의 항일 거병을 촉구했다.
2000년에 <동학연구> 제6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희근의 논문 '1894년 동학 지도부의 제2차 기병(起兵) 추진과 그 성격'은 "최시형 등 북접 지도부도 대원군의 계획, 즉 국왕의 뜻을 파악하고 지금까지 관망적인 자세에서 탈피"했다며 위 '9·11 통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논문에 따르면 이 통문은 "지금 일본군이 크게 소란을 일으켜 조선이 다칠 우려가" 있다며 "머리가 당기고 마음이 찢어지며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한 뒤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보국안민의 의리로 보아 어찌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다만 원컨대 우리 도(道) 제군자(諸君子)는 북이 한번 울리며 일어날 것을 약속하고 대무(大務)에 뜻을 같이하며 제반 군용(軍用)을 잘 갖추어서 충성을 다하고 나라에 보답하는 자리로 향할 뿐이다."
우리 교의 모든 군자님들은 북이 울리면 군사 무기를 갖춰 일본에 맞서라고 명령했다. 최시형의 이 지시는 실제로 동학교도들을 움직였다.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에서뿐만 아니라 북접 통제하에 있던 경상도 및 황해도에서도 봉기하였다. 실제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11월 12·13일(양력)에 충청도 청산에서는 농민군 2만여 명이 전봉준 부대와 연합해서 2차 기병을 추진하기 위하여 모였다. 이때 충청도뿐만 아니라 멀리 진주·안성 등 경상·경기도 지역의 농민군까지도 참가하였다."
김구의 기억... 그가 어찌 독립운동가가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