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끄집어내다

세월과 함께 변하는 것, 옛날이 그리워요.

검토 완료

최미숙(cms743)등록 2023.12.12 15:30
올처럼 기상 이변이 심한 해도 드물었을 텐데 그래도 시간 가는 것까지는 거스를 수 없었는지 가을이 지나고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12월이다.
 
광주에서 대학 시절 보낸 것을 빼고는 어릴 때부터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 순천을 벗어난 적이 없다. 엄마 곁을 떠나 혼자 산다는 게 두려워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82년도에 여수 화양면으로 첫 발령을 받고 차를 왕복 일고여덟 번을 갈아타야 하는데도 꾸역꾸역 집에서 다녔다. 아마 성인이 다 되도록 분리 불안이 있었던 듯싶다. 지금은 순천 '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동네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등학교와 여자 중 고등학교가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대학 가기 전까지는 그 부근만 왔다 갔다 했다. 70년대 순천에서는 내로라하는 집 아이가 다 모인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반 학생 수가 80명 가까이 됐다. 수업이 끝나면 고무줄놀이는 기본이고 친구들과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치마에 잔돌을 가득 주워 땅바닥에 깔아놓고 둘러앉아 공기놀이를 하다 해가 질 때쯤 집에 가곤 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동네 친구들과 주야장천 뛰어놀기만 했다.
 
학교 가는 길에 동천으로 흐르는 냇가가 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제사 지낼 때 쓸 모래를 뜨기도 하고 동네 친구들과 꼬막 껍질로 소꿉놀이도 했다. 물이 맑다 못해 시리기까지 했는데 큰 바위 사이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물을 보고 있으면 어지러워 내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많던 바위와 돌을 없애고 양쪽을 인도로 만들어 옛날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그래도 군데군데 운동기구도 설치하고 홍매화를 심어 봄이면 빨간 매화꽃이 무척이나 화려한 산책길이 되었다.
 
동네 오빠들은 가까운 냇가보다 깊은 소(沼)에서 놀았는데 매년 물에 빠져 죽은 아이가 몇 명씩 있었다. 가끔 따라가면 무서워 물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서 구경만 했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모인 남자애들이 다이빙한다며 높은 바위에서 몸을 날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바느질하느라 바쁘고, 대신 시간이 많은 아버지가 언니와 나, 동생을 데리고 삼산 천으로 피라미를 잡으러 다녔다. 아버지가 두세 개의 복수에 된장을 발라 물속에 넣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물에서 놀았다. 수영을 못 해 얕은 곳에서 손으로 바닥만 짚고 다녔지만 더운 여름 그만한 피서도 없었다. 아버지는 피라미에 고춧가루와 된장을 풀고 호박, 방아잎, 고추를 넣어 매운탕을 끓여 줬다. 물이 줄줄 흐르는 옷을 입은 채로 햇빛에 달구어진 넓적한 돌 위에 앉아 먹었던 칼칼하고 매콤한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빨간 국물을 한 입 떠 넣으면 입안 가득 감칠맛이 돌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어디서도 그때 그 매운탕을 맛보지 못했다. 여름이면 바다 대신 삼산천으로 물놀이 가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다시 찾은 그곳에는 보트장이 생겼고 주변으로 닭백숙집이 들어섰다. 특별히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 사람들이 가족과 자주 찾는 나들이 장소가 되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다 없어졌고, 대신 천 주변으로 고층 아파트와 산책로가 생겨 걷기 운동하는 사람이 많이 이용한다.
 
세월과 함께 많은 것이 변하고 사라졌다. 그동안 기억 깊숙이 숨어 있는지도 몰랐고, 꺼낼 기회도 없었던, 그대로 영원히 묻힐 뻔한 것들이 그때의 냄새와 배경은 그대로인 채 낯익은 풍경이 되어 나타났다. 모래를 싣고가는 말수레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뽀얀 디디티(DDT) 가스를 뿜어 대던 소독차를 쫓아다니며 깔깔대던 친구들과 매운탕을 끓여 우리를 부르던 아버지도 머릿속에서 부활했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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