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0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필수의료 혁신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필수의료의 본질적 위험을 피해 불확실성이 낮은 의료만 하는 길도 있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매우 작은 의료만 전문으로 제공하는 병원을 차리는 방식이다. 미용성형이 흔히 언급되지만 다른 분야도 가능하다.
하지정맥류, 시력교정술, 척추 수술, 통증 완화, 다이어트 치료 등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는 이미 받고 싶은 서비스가 구체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방문한다.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드물고, 위독해질 낌새가 있다면 대학병원으로 보내면 그만이다.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질환에 집중하기 위함이니 환자를 골라 받을 명분도 있다. 누가 올지 예상할 수 있으니 의사의 일을 진료보조 인력에게 나눠 주기도 수월하다. 상담실장과 코디네이터, 사무장 같은 직함을 단 사람들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수가와 의료 소송이 문제라는 오래되고 낡은 진단 뒤에는 불확실성과 긴급성을 떠넘겨 온 의료 시장이 있다. 높은 불확실성과 긴급성 속에서 위험 부담이 큰 환자를 진료하며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해 온 병원과, 불확실성을 줄여 위험을 최소화하되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병원이 분리되어 온 결과다.
정부는 필수의료의 가격을 건강보험으로 묶어두었을 뿐 민간의 자유로운 개업과 시장 창출을 권장하며 방치해왔다. 이 상황은 정부가 기대했던 의료산업의 고도화와 시장화가 맺은 결실인지도 모른다. 면허만 받는다면 고소득 개인사업자가 되어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의료시장을 창출해 냈으니 말이다.
의사의 면허는 숫자가 고정된 희소 자원이다. 한정된 숫자의 의사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정부는 사실상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실손보험의 힘을 입어 의료시장에는 돈이 흐르고, 의사들 역시 위험하고 힘든 필수의료 대신 안전하고 편한 데다 기대소득도 높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 병원에 남아 적은 월급, 긴 근무 시간을 감내하며 불확실성과 위험을 온몸으로 감당하지는 않겠다는 선택이 그저 요새 사람들의 특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미뤄버릴수록 이득이 되는 의료체계에서 누가 그런 선택을 할까? 명예와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회의 변화 역시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돈은 되고 소송은 피할 수 있는 의료만 하겠다는 지당한 마음들이 모여 필수의료 공백이라는 수렁이 깊어지고 있는 지금, 돈을 더 주고(필수의료 수가 인상) 경쟁은 늘리면(의사인력 증원) 문제가 해결될까? 적어도 의료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데 시장은 실패했다. 반면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실패조차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돈 되고 소송 안 걸리는 의료만 하겠다는 마음이 만들어 낸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부하더라도 어떤 가치와 전문성의 양식을 기반으로 어떤 의사를 키워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그리고 이 모든 논의는 사람들의 필요에 반응하는 좋은 의료제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