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령골에서 학살된 주검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이관술도 여기서 불법 처형되었다.
기밀해제된 1947년 8월 13일 자 미군정사령관 문서에는 "재판 과정에서 법원 연락장교와 한국인 직원들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처리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이 경성법원을 주의 깊게 통제하면서 진행되었다. 미군정은 당시 사건의 배당은 물론 재판 결과까지 뒤집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결국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쌀값을 비롯한 생활 물가 폭등으로 미군정에 대해서 조선 민중이 등을 돌리자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이 날조했다는 게 임성욱의 분석이었다. 미군정의 의도대로, 가뜩이나 찬탁으로 오인받아 정치적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를 찍어 경제를 망쳤다"는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손옥희는 논문을 접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 논문 한 편은 씻김굿과 같았다. 실제 할아버지는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수배를 당했을 때 조선공산당 일각에서 북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도망 가면 오히려 날조를 도와주는 격이라며 당당히 맞서겠다고 했다. 또 할아버지는 1946년 5월 4일부터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등이 본정서 형사대에게 잡혀갔을 때 항의하러 조선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장택상이 자리를 비워 못 만났지만) 이관술이 위조지폐를 정말로 지시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신념을 갖고 공산주의 운동을 한 것은 좋다. 미군정하에서도 조선공산당은 합법적인 지위를 일정 시기까지는 갖고 있었으니. 그런데 '위조지폐'를 만든 사기꾼이고 경제사범이라는 허물은 큰 굴레였다. 임성욱 교수의 연구로 이를 벗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손옥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이 논문은 2019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연구>(신서원)라는 묵직한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이에 대해 어떠한 반대 논문이나 주장도 나오지 않고 있어 역사학계에서는 이 연구가 점차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향 울산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2013년부터 손옥희는 배성동이나 배문석 같은 지역의 향토사학자, 노동운동가 등과 머리를 맞대고 이관술기념사업회 결성을 추진했다. 임성욱의 논문이 나오니 활동은 더 탄력을 받았다. 마침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4월 당시 김종훈 국회의원(현 울산동구청장)과 박재동 만화가를 자문위원으로, 배성동 작가를 공동대표로 하여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발족을 기념하여 세미나 '항일운동가 이관술'이 2019년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2023년 6월 29일에는 성균관대의 임경석 교수가 제안하고 동아시아역사연구소가 주최한 '이관술과 그의 시대'라는 학술회의도 열렸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진화위를 통해 진실규명을 하고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아내는 것이다. 물론 보훈처를 통해 서훈을 받는 일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