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에서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에게 보낸 공문광복이후의 행적 때문에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손옥희 제공
사실 손옥희에겐 서훈보다 더 절실한 과제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대가를 바라고 목숨을 바친 게 아니기에 정부의 표창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조작되었고 할아버지가 누명을 썼음을 밝히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손옥희는 2023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할아버지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담당부서가 된 형사21합의부에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사건 관련 기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검찰은 지난 8월 '경성지방법원 1946형공제2336'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장짜리 답신을 보내왔다. 또 8월 24일 자로 "재심신청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밝혔다.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이들 공문을 받아 본 손옥희는 긴 한숨이 나왔다. 쉽지 않으리라 봤지만 공판기록과 판결문 원본이 없다면 재심 개시를 결정하는 데 아무래도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재심이 열려야 무죄를 다툴 수 있을 터인데 답답한 마음이다.
고민 끝에 손옥희가 생각해 낸 방안이 유가족을 모으는 것.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할아버지부터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홍계훈까지 치면 열 명의 구속자 유족이 있으니, 이들을 모아 함께 목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마치 골령골 유족이 함께 모여 이승만 정부의 불법 처형을 밝혀냈듯 70여년 가까이 숨죽이며 살아왔을 이들을 모아 '정판사'사건의 진실을 밝혀낼 작정이다. 그래서 손옥희는 호소문 작성에 나섰고 이 한 장의 글이 메아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집안의 누구도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손옥희가 몇 줄을 더 써내려갔을 때 건넌방에서 손주 울음소리가 들렸다. 손옥희는 잠시 펜을 놓았다. 손주의 꼬물거리는 손을 잡고 젖병을 물린다. 뒤늦게 결혼하여 직장생활하랴 애 키우랴 힘든 딸을 뒷받침하러 포항에서 올라와 주중에는 세종시에 머무른다.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다. 그 숱한 시련을 겪고도 이렇게 대가 이어지는 게 신기하다. 할아버지 이관술이 이 정경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까?
손옥희는 할아버지 이관술에 대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이름 석 자를 알았을 뿐 청년시절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어머니 이경환은 당신의 아버지 이관술에 대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이관술의 사위이면서 손옥희의 아버지인 손붕익도 마찬가지. 이관술은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비밀창고에 갇힌 존재였다. 집안의 누구도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집 밖에서 불현듯 들려와도 못 들은 척 흘려보낼 뿐. 때문에 손옥희에게 할아버지는 안개 가득한 태화강변을 거니는 흐릿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존재가 집안에 드리운 상처는 컸다. 당신만이 아니라 할머니 박가야, 세 이모 성옥, 경옥, 정성이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할아버지의 동생 이학술과 사위이며 큰 이모 이정환의 남편인 박동철은 총살을 당했다.
박동철은 울산농고를 나와 착실하게 범서면 면서기를 했으나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 당해 울주군 운화리 대운산골짜기에서 주검이 되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큰이모 정환은 서러워할 틈도 없었고 외로워할 처지도 아니었다. 친정으로 돌아와 유복자 박경희를 낳고 무너진 집을 수습해 농사일에 나섰다. 이정환은 집안은 단정하게 하면서도 집밖에 나갈 때는 남의 눈총을 받을까봐 험한 옷을 입었다. 그런 세월을 살다가 이모는 쉰을 갓 넘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이관술이 감옥살이를 하고 어머니 박가야와 어린 동생들을 전쟁 중에 잃었으니 한평생 가슴에 납덩이가 그득했으리라. 이 비극이 이승만 정부의 집단학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할아버지에 관해 어떤 얘기도 하지 않는 게 하나의 약속이었다.
엄마 이경환도 업보를 지고 살았다. 시집 간 경주 강동면 삽실마을에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누구누구의 딸이어서 이런 골짜기의 가난한 양반한테 시집왔다"라고. 어머니는 한 귀로 흘렸다. 묵묵히 수행하듯 논일과 밭일에 열심이었다. 동네 관혼상제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일머리를 잡고 설거지까지 도맡았다. 공산당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위조지폐'를 만든 범죄자란 멍에까지 있으니 어머니 이경환이 시댁 동네에서 이고 가는 짐은 버거웠다. 아픈 가족사다. 이 아픔을 딛고 손주가 고운 모습으로 자라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손옥희는 손주를 다독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생각 같아선 한달음에 써내려갈 것 같지만 문장은 어둔 밤을 헤맨다. 내가 이러구서 어떻게 애들에게 작문을 가르쳤담, 자신을 책망하다 손옥희는 책상 한 켠에 붙여놓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의 할아버지 모습이다. 문득 손옥희는 그때 할아버지가 꾸었을 꿈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