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21일 자 <매일경제>에 실린 '우리의 국토 제24회 경부선 철도'
매일경제
이는 꽤 오랫동안의 준비 작업을 거친 결과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허락도 없이 이 작업을 진행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대일 개항 이후로 조선 각지에서는 일본 밀정들이 곳곳을 염탐하며 지형과 교통을 조사하는 일들이 있었다. 김의원 국토개발연구원장이 1983년 10월 21일 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우리의 국토' 제24회 경부선 철도편에 이런 사례가 소개됐다.
"일본은 경부선 철도에 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쏟아왔는데, 1885년에는 송전행장(松田行藏)이란 자가 4년 간에 걸쳐 노선을 구상하면서 답사한 일이 있다. 이때 전도밀(前島密)이란 자가 일본 철도와 연계하여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은 물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횡단철도망을 예상하여 조선반도 종관(縱貫) 철도를 일본 자본에 의해 부설하는 것이 급무란 것을 역설하여 조야의 주의와 관심을 환기시킨 일도 있다."
이런 사례는 일본이 꽤 오래전부터 한반도 철도망 구축을 준비해왔음을 보여준다. 한국 지배와 중국 침략을 위한 기획이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일본을 위해 한국을 착취하는 경부선 철도 사업의 본질은 계약 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이에 관한 1898년 계약인 경부철도합동(合同)은 일본이 부설권과 영업권을 독점하도록 규정했다. 한국은 철도 부지를 무상 제공하고 영업이익에 과세를 하지 않기로 했다.
계약 단계에서만 농락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한국이 철도 부지를 무상 제공했으니, 그 토지의 주인들이 제값을 받기는 힘들었다. 경부선 철도 특집 편인 1981년 6월 30일 자 <매일경제>는 "철도 부설로 논밭을 잃은 농민들은 울화통이 터져 활빈당이 되어 화적질로 심사를 달래는 판국이었다"고 말한다.
임차인이 아닌 소유자가 화적이 되는 일들이 많았다. 토지가 수용되면 소유자가 아닌 세입자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지만, 일제 침략 때는 소유자도 화를 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철도 공사에 동원된 한국인들 역시 손해를 입었다. 이들은 노동력을 헐값에 제공했다. 이들의 임금은 동일한 기술 수준을 가진 일본인의 3분의 1밖에 안 됐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이 노동력 제공을 기피하자, 일본은 한국 지방정부를 움직여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했다.
이때는 을사늑약 이전이었다. 군사동맹만 체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한국의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 물건처럼 사용했다. 심지어 한국 공권력까지 마음대로 흔들어 대며 이런 착취를 일삼았다.
시흥군민 수천 명이 궐기한 것은 그런 탐욕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일본의 노동력 동원에 대해 시흥군이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1904년 7월 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도리어, 노동자 모집 비용이 주민들에게 전가됐다.
경부선 철도에 담긴 일본의 탐욕을 정면으로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