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고녕가야의 흔적과 봉천사 개미취의 향에 취해

고녕가야 선양 운동애 앞장 서는 봉천사의 지정 스님에게 듣는 역사 이야기와 개미취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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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철(kkc0828)등록 2023.11.18 20:15
 

고녕가야 태조 고로왕릉 서기 42년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한 연대와 동일한 연대에 수로왕의 셋째 동생인 고로왕은 상주문경함창 지역에 고녕가야를 세우고 215년 간 3대의 왕들이 통치를 하였다고 한다. ⓒ 김광철

 
지난 9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가야고분군(Gaya Tumuli) 7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그 때 경북 고령의 '고령(高靈) 대가야' 고분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포함되었지만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는 상주, 함창, 문경의 '고녕가야(古寧伽倻)'는 제외되었다. 그 바탕에는 식민사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임라일본부'설이 자리 잡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의하면 '임나'는 3세기 말에 건국이 되었고 고녕가야는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병합이 되었기 때문에 임나(가야)가 건국 되기 이전의 국가이기 때문에 가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바로세우기운동' 시민단체, 재야사학회, 상주 문경 주민들, 함창김씨 등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상주 '머리메'의 고인돌에서의 고유제 고녕가야 역사 복원 선양회가 중심이 된 제5회 범국민 대회에 앞서 이곳 상주의 기운이 다 모였다는 'ㅋ큰뫼'의 고인돌 앞에서 국민대회를 하늘에 알리는 고유제를 지내고 있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모이는 이곳 상주에는 공갈못 등 삼한의 유적과 고인돌 등 고대 역사가 오롯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 김광철

 
지난 10월 28일, 고녕가야 시조 고로왕릉이 있는 상주 함창에서는 '제5회 함창 고령가야 역사복원 범국민대회'를 열고 고령가야 고분군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번 집회는 이 운동에 앞장서는 '상주함창문경 고녕가야선양회 대표'인 봉천사 주지 지정 스님과 '식민사관청산가야사전국연대'의 이용중 상임대표 등이 중심이 되어 관련 단체 회원들과 상주, 문경 지역 주민 등이 모여 진행되었다.
 

문경 월방산 자락의 안온한 봉천사 주변에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널려 있지만 멀리 낙동강과 내성천이 내려다 보이는 명당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봉천사 ⓒ 김광철

 
  

봉천사는 주변 절 밭 비탈의 수많은 바위들 화강편마암 바위들이 절 밭 이곳 저곳에 널려 있었다. 그 바위마다 형상을 살려 지정 스님은 다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다. ⓒ 김광철

 
이번 집회 참석과 가야 역사문화 탐방을 위하여 이석문 전 제주 교육감과 교장 출신 교육자들 5명도 함께 하였다. 제주 출신인 나도 서울에서 내려가 경남 밀양의 배수철 선생 부부와 함께 이들과 동행하였다. 우리 일행은 10월 25일부터 경남에서 머물면서 김해의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구지봉,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과 함천의 옥전 고분군 등을 둘러보고 나서 27일에는 문경의 '봉천사'라는 절을 찾았다. 봉천사는 '상주함창문경 고녕가야 선양회' 대표인 지정 스님이 주지로 있는 곳이다. 이 절은 개미취 축제로 유명해 져서 1년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찾는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있다.
  

봉천사 절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주들과 낙동강 절집 앞 너른 너럭바위 위에 파인 곳엔 작은 못이 있고 바위틈 사이사이를 비집고 버티고 있는 이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조망하면 온 세상이 한 품에 안기는 기분이 드는 절경지이다. 거기에 당교와 왕건, 견원의 전투에 얽힌 역사까지 ⓒ 김광철

   

봉천사의 풍광을 노래하고 있는 시와 그림들 봉천사에서 내려다 보면 해뜰녁과 해질녁의 노을과 해가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풍광에 빠져든 시인, 사진 작가 등의 작품들이 절 곳곳에 전시되어 길손들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었다. ⓒ 김광철

 
절집 앞으로는 멀리 내성천과 낙동강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소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강 위로 솟구쳐 뜨는 해와 저녁놀에 물드는 풍광은 가히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절 밭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널려있고, 그사이에 활짝 핀 개미취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절 주변 비탈 밭들을 내버려 두었더니 칡과 억새, 환삼덩굴, 잡목 등이 우거져 볼품이 없어 그 비탈밭을 개간하여 개매취를 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미취는 국화과 식물로서 키가 2미터 이상 자라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야생하는 초본류 중 키가 거의 제일 큰 식물이다. 봄에 어린잎은 뜯어서 나물로 이용하기도 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의 가을에는 아기 손바닥만 크기의 보라색 꽃이 활짝 핀다.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봉천사의 바위들 거북 모양, 개구리 모양, 새의 모양 등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 화강편마암 바위들이 절 밭 이곳 저곳에 흩어진 사이로 소나무들까지 이우러져 이곳의 풍광을 더욱 밝히고 있었다. ⓒ 김광철

   

봉천사의 개미취와 소나무들 봉천사 주변 절 밭 사이 사이로는 굵다란 적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사이 비탈 밭에는 개미취들을 가득 심어 잡초와 잡목들을 억제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명소가 되어 있다. ⓒ 김광철

 
절집 뒤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 자락인 월방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절집의 넓은 마당 앞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바위 틈에는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비집고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 바위 주변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가 고즈넉이 앉아있고, 그 암자 앞에는 커다란 고인돌도 자리를 하고 있었다.
 
절 밭 곳곳에는 거북 모양, 새 모양, 개구리 모양 등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는 화강편마암의 바위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님은 그들 바위 하나 하나에게 '왕건 , '신선암' 등 바위의 형상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붙여놓고 있었다. 그런 바위나 나무들 사이에는 이곳 봉천사에서 조망할 수 있는 풍광과 산수, 바위, 소나무 등을 소재로 하는 시화와 사진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정서에 호소하고 있기도 하였다. 절 마당에는 스님이 화분에 심어 가꾸었다는 국화들이 절 주변에 아직 한창인 산국들과 함께 제철을 만나 갖가지 색의 꽃들을 피우고 있어서 더욱 정감이 갔다.
 

수만평의 절 밭에 가을을 밝히고 있는 개미취들 봉천사 주지인 지정 스님이 수년간 심고 가꾸어서 오늘의 봉천사 개미취원을 일구었다 한다. 원래는 칡, 억새, 환삼덩굴, 잡목 등이 널부러져 보기가 흉한 것을 개간하여 오늘의 꽃밭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 김광철

   
지정 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이곳 역사의 한 도막을 설명해 준다
"절 앞으로 펼쳐진 너른 산비탈과 낙동강, 내성천의 물 건너로는 너른 상주의 벌이 펼쳐지죠?. 인근에는 KBS의 역사 스페셜에서 다루어지기도 한 '당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당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나라 소정방 부대가 이곳에서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냇가 다리 밑에는 시신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합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고 그 자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죠. 그걸로 끝내질 않고 경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까지 병합을 하려하자 김유신이 나서서 이 일대에서 소정방을 유인하여 독살하고 당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입니다. 한편으론 후삼국 시절, 왕건이 이곳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견훤의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치기도 하였다 합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맞닿는 곳이라 크고 작은 싸움들이 빈번했던 곳이지요."
 
우리 일행은 이렇게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개미취 속에 파묻혀 있는 절집과 절 밭을 둘러보았다. 절정기를 넘겨 시들어가는 개미취의 꽃과 잎들의 채취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지정 스님을 따라 고녕가야 고분군이 몰려있는 오봉산 고분군으로 향했다.
 

파헤쳐진 고녕가야의 고분들 오봉산 자락에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봉곳한 무덤은 어느 거 하나 성한 것이 파헤쳐져 도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김광철

 
 
 9000여 기의 고녕가야 고분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도굴되어 흉악한 형상을 하고

오봉산 고분군 자락에 도착하니 지정 스님의 고분들에 대한 안내가 이어진다.
"이곳의 고분들은 고녕가야 고분들로 추정이 되는데, 가면서 보면 아시겠지만 성한 무덤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파헤쳐져 도굴이 되었습니다. 요 앞에 있는 무덤 꼴을 갖추고 있는 10여 기는 제가 상주군에 강하게 요구하여 볼썽사납게 방치되어 있던 것을 단장해 놓은 것들입니다. 숲 속에 들어가서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봉곳하게 솟아있는 봉분들 중 원래의 형태로 오롯이 보전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로 일제 때 도굴이 되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문화재 밀매가 성행할 때 많은 도굴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됩니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아카시, 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으로 들어가면서 옛 무덤들을 살펴보니 파여지지 않은 무덤은 볼 수가 없었다. 어떤 무덤들은 횡혈식이라 그런지 봉분의 옆구리가 파헤쳐져 있는데, 그곳 안쪽으로는 무덤의 현실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로 보이는 곳이 돌로 벽을 쌓고 그 위에는 덮개돌로 덮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쪽으로만 파헤쳐진 것들도 있지만 양쪽에서 마주 보고 파고 들어가 도굴을 했던 흔적들을 볼 수도 있었다. 우리 일행들 중 서너 명은 도굴했던 무덤 통로 쪽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기도 한다.
 
지정 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 오봉산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뚫을 때 이곳 고분들에서 4000여 기의 유물들이 수습이 되어 일부는 경주, 상주, 중앙박물관 등에 보내져 전시되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대구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오봉산 지역뿐만 아니라 이 일대의 야산에는 수많은 고분군들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지정 스님은 말한다. 문경, 예천, 안동 등지에 약 9천 여 기의 고분들이 널려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스님이 '고녕가야선양회' 활동을 하기 때문에 고분이나 유물, 유적들이 발견이 되면 사람들이 연락을 해 준다고 한다.
  

옆으로 파헤쳐진 고분 횡혈식 무덤인지라 옆으로 통로를 파 들어가 도굴이 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무덤의 입구는 돌들을 쌓고 그 위에는 덮개돌을 덮은 형태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 김광철

 
그러면서 이번 탐사에 나선 이석문 전 교육감은 시와 도의회와 시장, 군수, 도지사 등을 움직여서 이곳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 급선무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지정이 되면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 예산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고분 발굴 작업 등을 통하여 이곳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는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일행들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으기 위한 서명 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스님께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고녕가야 시조 고로왕릉에 대한 설명 고녕가야 태조 고로왕의 후손들을 함창김씨라 부른다. 그 함창김씨 종친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한태씨가 우리 탐사단을 안내해 여러 가지 설명을 해 준다. ⓒ 김광철

 
 상주 함창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고녕가야 태조 고로왕과 왕후

우리 일행은 오봉산 고분군을 둘러본 다음 상주 함창에 있는 '고녕가야' 시조인 고로왕릉을 찾았다. 함창읍 증촌리에 위치한 '고녕가야' 시조 고로왕릉이라는 것은 이미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묘지석이 발견되어 숙종 이후로 이곳에 석물을 세우고 보존하는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고 한다. 고로왕의 후손들인 함창김씨 종친회를 중심으로 해마다 왕릉에서 제를 지낸다고도 한다. 이날은 함창김씨 종친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한복 씨가 앞장서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자신은 이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 어릴 적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 떡을 얻어 먹었던 기억, 무덤에 올가 미끄럼을 타고 놀던 기억 등이 또렷하다고 한다. 고로왕릉에서 동북 방향 200여 미터 떨이진 곳에는 왕비릉이 자리 잡고 있다. 삼국사기나, 창평김씨 족보에는 '고녕가야'를 건국했던 고로왕을 시조로 하고 있고, 고려 명종 때 덕원군 김종제와 덕양군 김종계 형제를 중시조로 하여 고려, 조선에서 벼슬을 한 사람들을 많이 배출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 약 4만 명의 창평김씨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주도했던 이병도는 주장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등장하는 '고녕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 등의 위치와 멀리 떨어진 상주, 함창, 문경 등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진주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라 빈약하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고녕가야 태조왕릉 앞에 세워진 사적비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사적비에는 고로왕이 고녕가야를 세우고 어떻게 발전을 하다 신라에 병합이 되었는지, 그 후대들은 어떻게 가문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왔는지 등을 기록하고 있었다. ⓒ 김광철

   
대부분의 가야 소국들은 낙동강과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인 남강, 황강 등 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 자리 잡고 낙동강을 따라 내륙 수운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 유역에서 문화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상주, 함창, 예천, 안동 등이 경북 내륙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고녕가야'가 가야의 한 나라가 아니라는 주장은 빈약한 논거가 아닐 수 없다. 고녕가야를 세운 고로왕은 수로왕의 셋째 동생으로 서기 42년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할 때와 같은 연도에 건국이 되어 2대 마종왕, 3대 이현왕까지 215년 간 나라가 존속이 되다가 신라의 침략을 받아 신라에 병합이 되었다고 한다.
  

고녕가야 태조 고로왕비릉 고로왕릉에서 동북 방향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 김광철

 
우리 일행 중 일부는 28일 2시에 있었던 '고녕가약복원 범국민대회'가 열리기 전 오전에 이 지역의 중심지인 '머리메'의 고인돌 앞에서 있었던 고유제에 참석하였다. 간단하게 제수를 차리고 절을 하고, 끝에는 우리 일행 중에 배수철 선생이 '상주모심기' 이 지방 민요 한 자락을 멋들어지게 부르니 참석자들이 많은 박수를 보냈다. '상주모심기'에 등장하는 '공갈못'은 삼한 시대 4대 저수지라 하고 지금은 람사르 논습지로 지정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이번 상주 역사 문화 탐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흘러들어 물류와 교통의 요지로 곳곳에 고인돌이 널려있고 청동기 시절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 고녕가야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내가 역사, 문화에 대한 소양이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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