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놀데, <순교 II>1921년, 굵은 삼베에 유채,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놀데는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에밀 놀데의 <순교 II>를 보자.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 그를 희생시킨 유대인들이 모여있다. 드디어 목적을 이뤘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들의 외형은, 흔히 유대인들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모습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과장되리만큼 긴 매부리코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미술평론가 크리스티안 포겔은 이렇게 논평했
다. "(놀데가 묘사한) 악의적이고 이죽거리는 얼굴들은 최고로 역겨운 유대인 캐리커처다."
놀데는 왜 이런 '반유대주의' 행동을 했던 것일까? 김경미 계명대학교 교수의 논문 <20세기 초반 독일 화단과 에밀 놀데의 반유대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놀데가 나치당에 가입한 것은 독일적인 정체성과 예술을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었다.
덴마크 여성과 결혼한 놀데는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 근처 농촌인 우텐바르프에 살았는데, 이곳이 1920년 주민투표를 거쳐 덴마크령으로 최종 정리되는 바람에 덴마크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독일 국적의 회복을 원했던 놀데는 국경 이남의 독일령 제뷜로 이주했고, '나의 진짜 조국은 독일'이라는 증거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과잉 충성'한 결과라는 것이다.
놀데의 그림도 그런 의식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놀데의 그림 속에서 완벽한 타자 그 자체다. 유대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통해, 한때 덴마크 사람이었던 놀데는 그보다 좀 더 나은 '독일인다운 독일인'이 될 수 있었다.
놀데가 그린 '중립적' 그림이 미친 영향
이렇듯 누구보다 '독일인'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건만 놀데는 나치에 의해 단일 작가로는 가장 많은 숫자인 1052점의 작품이 몰수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철저하게 배반당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퇴폐 미술> 전에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치 패망 후에는 '나치에 박해받은 화가'로 인정받아 말년까지 존경받으며 살 수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친 자신의 생애가 그 자신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후 놀데는 자신의 '흑역사'를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자신이 진심으로 유대인들을 '증오'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적었듯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고, 그랬기에 나치당 가입도 그저 머릿수만 하나 채웠을 뿐이었다고. 반유대주의 표현도 마찬가지였다.
놀데의 설명에 따르면 자꾸 자신을 소외시키던 화단의 실세 막스 리버만과 파울 카시러가 마침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리버만과 카시러를 겨냥하기 위해 유대인이라는 '저주 인형'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이러한 설명에 맞춰 놀데는 1957년에 자서전을 개정하면서 반유대주의 표현을 대거 삭제하고 수정했다.
그랬다.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규정당한 사실이 말해주듯이, 에밀 놀데는 나치 주동자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힌 가해자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놀데는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그림을 그리고 글만 썼던 '방조자'였을 뿐이었으며,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처럼 나치돌격대와 유대인 사이 '중립'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어를 중립으로 놓으면 차는 기울어진 쪽으로 굴러가기 마
련이라는 점을. 작가 엘리 위젤이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처럼 말이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놀데의 '중립적' 그림과 글은 나치가 적극적으로 활개 치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유대인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게 했을 소극적이고 비겁한 방식의 가해였다는 점은 변함없다. 그의 '진짜 의도'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말이다.
13살의 나에게도 에밀 놀데같은 친구가 있었다. 하교 후 몰래 다가와 "너한테 다른 감정이 있어서 차갑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굳이 해명했던 친구가. 그저 나랑 친하면 자기까지 따돌림당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덧붙였던 아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반은 일명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고, 그 친구는 내가 그 폭탄을 떠맡아줘서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혹여 자기가 유대인이 될까 봐, 더 열심히 나를 배제했다는 고백을 돌려서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고맙다고도, 괜찮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아이의 죄책감을 해소하도록 두지 않는 것. '나는 그나마 좋은 사람'이라는 그 아이의 자기 만족적 위선에 부응하지 않기. 아마도 바로 그것이 13살의 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최소한의 자존이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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