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2020년 <공존의 인간학> 제4집에 실린 김태훈 시코쿠학원대학 교수의 논문 '조선총독부 관보로 보는 일본계 종교 유입의 전체도'는 "각 종파별로 확인되는 포교 거점의 총수는 1453개소"라고 한 뒤, 그런 포교 거점의 66%는 일본불교, 26%는 신도, 8%는 일본 기독교였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제국주의의 침략과 달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서는 일본불교와 신도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 침략을 어느 정도 달성한 뒤에 일본 종교들이 뒤따라 들어온 게 아니다. 이들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위 논문에 설명된 일본불교 분파들의 한국 진출 시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불교의 일파인 대곡파가 조선에서 포교를 개시한 시점은 강화도사건 2년 뒤인 1877년이고, 일련종이 포교를 시작한 때는 1879년이다. 일본 국가권력이 강화도사건과 이듬해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문호를 개방시킨 직후에 일본 종교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됐던 것이다. 대곡파와 일련종에 뒤이어 1892년에는 조동종, 1895년에는 본원사파, 1897년에는 정토종, 1905년에는 진언종이 포교를 시작했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선을 제압한 시점은 강화도사건 19년 뒤인 1894년 청일전쟁 때다. 1875년 이후부터 1894년 이전에도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이 시절 일본은 아직은 청나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기에도 일본 종교는 조선에 진출했다.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첨병 역할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에서는 일본불교와 신도를 통해 나타났던 것이다.
일본 종교가 그런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양 도성의 남산 풍경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조선 정치의 중심인 경복궁 앞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 남산에 일본 종교를 비롯한 제국주의 시설들이 일렬종대로 배치됐던 사실에서도 그것이 확연하게 표출됐다.
그 시절 기억을 지우지 못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