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거면 왜 왔나, 매일 프랑스 거리에서 다투는 한국인 부부

너무나 다른 너와 나, 정반대에 서서 봄을 찾아가는 우리의 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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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uyunish)등록 2023.10.30 08:02
파리, 빠리, 빠히.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공기마저 우아하게 춤추는 도시. 몇 년 전 봤던 색깔들이 아직 그리웠다. 새하얗게 빛나는 상아색 건물, 세월을 간직한 코발트색 지붕이 가득한 복잡한 거리. 밤이면 오렌지색 낭만적인 옷으로 갈아 입는 그 곳. 언젠가 꼭 다시 와서 질릴만큼 이 풍경을 눈에 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짙은 회색빛 겨울을 가득 껴안은 파리에 올해 2월, 정말로 다시 오게 되었다.

작년은 우리에게 좀 특별했다. 나와 남편 둘 다 쳇바퀴속에서만 평생 머무를 것만 같던 시간에서 벗어나, 태어나 처음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보기에 도전했다. 미래를 위하는 척 현재를 속이는 대신, 오늘에 초점을 맞춰 채워간 무모하고 즐거웠던 날들. 그 해가 다 저물기 전 가장 커다랗게 부풀어 있던 소망, 외국에서 한 달 살기라는 풍선을 터트려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조건 놀러오라던 파리의 사촌언니에게 여행 계획을 말했다.

'더 따뜻해지고 오면 안돼?' 예상대로 언니의 반대. 조금 더 있다가 완연한 봄에 오면 꽃과 나무가 가득한 환상적인 도시를 볼 수 있을거라고. 겨울은 볼 것 없이 내내 흐리고, 춥고, 비만 온다고. 예전같으면 그 말에 망설였겠지만, 미루는 건 하지 않겠다. 어둡고 축축해도 파리는 파리일테니. 결국 언니네서 한 달 하고 보름을 신세지기로 하고 비장하게 표를 끊었다. 이 짧고도 긴 여행을 통과하면 우리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우울한 아침 모든 기분을 끌어내리는 두꺼운 구름하늘 ⓒ 조성하

 

평생 멀미와 무관한 삶이었는데 이번 비행은 이상하게 힘들었다. 유쾌한 언니 부부와 정신없이 인사하자마자 골아떨어져 다음 날 눈을 떴다. 낯선 하얀색 천장과 페인트 벽, 우리를 위한 텅 빈 원목 옷걸이, 아기자기한 조명들. 천천히 방을 훑다 드디어 언니의 경고를 발견했다. 베개 옆 커다란 창문 너머로 잔뜩 심술난 하늘이 모든 것을 깔아 뭉갠듯 흑백으로 짓눌린 풍경. 아, 이게 바로 '그 겨울'이구나.

온몸으로 기압을 버티며 동시에 시작된 우리의 여행과 일상. 195cm의 기린 같은 언니의 남편과 183cm의 곰 같은 나의 남편이 나란히 서면 꽉 차는 부엌 풍경이 재밌었다. 넷이서 순서를 정해 화장실을 사용하고, 소음 방지를 위해 저녁 9시 이후엔 변기물을 내리지 않는 매너도 익혔다. 여기까진 좋았지. 1개 국어 가능자인 남편을 대신해 음식, 교통, 결제 등 모든 잡무를 나만 해결하느라 예민해졌고, 첫 외국 여행을 아내의 '외국인' 가족과 지내는 데다 낯선 높은 습도에 남편은 조금 힘들어했다. 며칠 만에 신경을 바짝 세운 고양이 두 마리가 되어 버렸다.

 

드문 겨울 풍경 가끔 파란 하늘이 보이면 설렘이 몰려온다 ⓒ 조성하

 
사실 겨울의 파리는 무채색조차 근사했다. 늘 공사중인 서울과 달리 머릿속 뿌옇게 남은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던 건물들. 창백한 도시와 대비되는 짙푸른 잔디와 공원. 끝없이 무겁고 흐린 날 가운데, 잠시 구름 이불을 걷어 새파란 하늘을 보여줄 때면 도시의 여행자는 황홀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조금 이상했다. 정신을 차리면 파리의 어느 길 한복판에서 미간에 힘주어 대화하거나, 말없이 떨어져 걷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날이 점점 늘어갔다.

나뭇가지만 앙상한 계절에 온 탓만은 아닐텐데. '평화'를 자랑하며 대화로 잘 풀던 우리였지만 스트레스 속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왜 그런식으로 말해?'가 내 단골 문장으로,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해?'는 그의 주력 상품으로 논쟁이 계속됐다. 감정과 뉘앙스가 중요한 나와, 논리와 사실을 원하는 그. 같은 상황을 겪어도 어쩜 그렇게 시선이 다른지. 참을 수 없어 말 한 마디를 꺼내면 화살이 되어 서로에게 날아갔다. 우리를 대변하듯 연금 개혁 시위가 한창인 프랑스에서는 어딜가던 경찰차 소리만 들렸다.

19세기 그림에서 갓 나온 듯한 모습, 탐스런 음식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눈길 한 번 던질 여유가 없었다. 옆방에서 자는 언니 부부에게 방해될까 모기 소리로 신경전을 벌이길 반복하다 쌀쌀한 3월 중순, 한 달 반이 흘러 파리를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그랬다. 나폴레옹이 묻혀있는 앵발리드 앞 광장에서 우리는 불에 데일 듯 뜨거운 말을 쏟아냈다. 어쩌다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화가 난 이유와 너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 내가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너는 왜 그런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런 집요한 대화가 한참 오고가다 새파랗던 하늘에서 뜬금없이 비가 쏟아졌다. 3월의 파리는 변덕이 심하다더라. 소나기를 피해 발 맞춰 뛰다 쁘띠 빨레의 동화같은 정원에서는 서로의 꼴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다 끝내지 못한 아까의 언쟁이 지속되고. 빗소리가 잦아들 때쯤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뚫어져라 마주보며 생각했다. 대체 왜 온걸까. 이렇게 싸우기만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다시 햇빛이 퍼지자 벤치로 나왔다. 오후 3시가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해 오전에 샀던 누런 빵 봉지가 그대로 손에 들려 있었다. 차갑고 납작해진 크루아상을 사이좋게 뜯어 먹으며, 지쳐서 느려진 목소리로 각자의 생각을 또 다시 설명하다, "그렇게 말해주니 이제야 마음이 이해 되네. 내가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해."

드디어 남편의 입에서 종결 문장이 나왔다. 감정을 알아주면 금세 서운함이 풀리는 나와, 온전히 이해가 되면 깔끔하게 정리하는 그. 길고도 긴 마지막 싸움이 끝났는데, 묘했다. 어느새 이 과정이 익숙해지는 것 같은 느낌. 그날 오후, 우리는 파리에서 가장 환상적인 노을을 봤다.

 

찬란함 명화 속 몽글몽글한 하늘 ⓒ 조성하

 

다툼을 연습이라도 했던 걸까. 땅굴 파듯 지하로 내려가야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걸 파는 행위가 용기이고 사랑이겠지. 어쨌든 우리의 사랑은 이랬다. 아마도 여기가 파리여서, 이 끈질긴 대화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거란 안도감 덕분에 자유롭게 다투며 모든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겨울과 여름의 양 끝에 서서 봄을 찾는 것. 그러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번 비가 내렸다 갰다, 순간 눈이 내렸다가 더웠다가.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든 순간을 겪을 뿐. 비가 내리면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갑자기 새파랗게 드러난 하늘의 속살을 보며 한시름 놓는다. 피할 틈 없이 거센 소나기가 쏟아지면 들고 있던 빵 봉지를 펴서 정수리를 가려본다. 이 비가 계속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어느새 저 멀리 해가 비친다.

이번에 만났던 파리의 늦겨울과 초봄은 꼭 너와 나 같았다. 너무나 다른 온도와 계절 속에서 간절히 봄을 찾던 시간. 그 모든 변덕을 겪고 난 뒤 결국 분홍색, 노란색, 하얀색 꽃이 탐스럽게 피어나 흑백이었던 세상을 물들이는 것까지도. 우리가 떠나는 날 거리에는 연분홍 목련이 흐드러졌다.

 

안녕, 봄 떠나는 날 만개한 목련 ⓒ 조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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