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권우성
육군이 국민적 반발에도 아랑곳없이 육군사관학교 독립전쟁영웅실을 철거하고 있다. 지난 16일부터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22일 보도됐다.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시도에 이은 이번 철거는 독립군과 국군의 연결점을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지만, 그곳에 모셔진 독립운동가들이 해마다 같은 날 떠올렸을 악몽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기도 하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법통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국군의 뿌리가 된다. 바로 이 광복군이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한 특별한 날이 있었다.
1940년 9월 17일, 백범 김구의 주도하에 광복군이 창설됐다. 광복군이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한 날은 이날이 아니다. 1942년 12월 1일,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로써 광복군의 대표성이 크게 제고됐지만, 이날 역시 그날이 아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멸망 3년 전인 1907년 8월 1일을 자신들이 잉태된 날로 인식했다. 육사에 흉상이 있고 독립전쟁영웅실에 모셔졌던 박승환 참령이 순국한 날도 바로 그날이다.
1967년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에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가 설치됐다. 이 위원회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7권은 8월 1일 상황을 자세히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그날 아침 한국군 대대장급 이상이 한국주차군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관저에 소집됐다. 이 자리에서 군부대신인 친일파 이병무가 신임 황제인 순종이 전날 공포한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오전 10시까지 각 사병을 도수(徒手)로 훈련원에 집합시킬 것"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냥 '훈련원에 집합'시키라고 하지 않고 '빈손으로 훈련원에 집합'시킬 것을 지시했다. 사병들의 무장해제까지 그날 관철시킬 참이었던 것이다.
박승환 대장이 순국하고 의병이 궐기한 그날
그날 아침 하세가와의 관저에 가지 않은 장교가 있었다. 박승환이 바로 그였다. <독립운동사>는 "이때 각 부대장의 긴급 소집을 들은 박승환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병을 칭병하고 중대장을 대신 보내어 동정을 알아 오게 하였는데, 결국 군대해산의 소식을 듣게 되니 분격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라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의자를 걷어차고 탁자를 두드리며 대성통곡하고 일찌감치 손을 대지 못한 것을 통탄하면서 그만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고 마니 온 영중에 크게 소란하였다"라고 묘사한다. 38세 나이로 스스로 순국한 그의 품에서는 "군인이 나라를 지킬 수 없고 신하가 충성을 다할 수 없으니 만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고 적힌 유서가 발견됐다.
이 순국은 한 개인의 인생을 마감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대한제국 군대의 죽음을 표상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승화됐다. 더불어, 그것은 죽음이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회생으로 이어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새로운 군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사>는 "이러한 박승환 대대장의 죽음은 그대로 대원들의 전투 명령이 되었다"라며 "대대장님이 죽었다는 고함 소리와 함께 격분한 사병들은 무기고를 깨치고 총기 탄환을 꺼내어 들어간다"라고 서술했다. 박승환 순국이 의병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것이다.
육사 독립전쟁영웅실에 모셔졌던 박승환은 이처럼 자기 몸을 던져 새로운 항일전쟁의 물꼬를 텄다. 이런 인물이 모셔진 육사 독립전쟁영웅실을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것이 윤석열 정권의 판단이다.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그런 일이 있었던 8월 1일을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인식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박승환 대장이 순국하고 의병이 궐기한 그날에 자신들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