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2일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장(왼쪽 여덟번째)과 홍남기(일곱번째), 김태년(아홉번째) 부위원장을 비롯한 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열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출범식에서 현판을 제막하고 있다.
이희훈
인수위가 그렇게 중요한가? 모든 어려움이 인수위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다. 잘못이나 어려움에 한 이유만 갖다 대는 이도 더러 있다. '이게 다 ○○○ 때문이야'라는 식 말이다. 게으르고 대책 없는 변명이다. 그게 입에 발린 변명이 아니라 실제 인식이라면, 그 뒤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 '인수위 없는 정부 출범'은 큰일이긴 큰일이었다. 겪어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2021년 11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회고했다.
"상상도 못 했던 탄핵사태를 뒤로하고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출발했다. 인수위 기간이 없는 상황을 수도 없이 가정하며 대비했지만, 탄핵받은 정부의 국무위원과 두 달이 넘게 동거하며 초기 국정의 틀을 잡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인수위의 역할과 기능이 그만큼 중요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네 가지 일을 한다. ①정부의 조직·기능 및 예산 현황 파악 ②새 정부 정책 기조를 설정하기 위한 준비 ③대통령 취임 행사 등 관련 업무 준비 ④대통령 당선인 요청에 따른 국무총리·국무위원 후보자 검증이다. 국정운영 준비의 핵심이다. 새로운 정부가 무엇을 국민께 내세울지, 정부는 어떻게 꾸리고 누구를 쓸지 정하는 일이다. 이때 인수위 성과가 임기 초반 승패를 좌우한다.
'시간 많을 때 뭐하고 인수위 타령이냐'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선거 때는 쥔 모든 카드를 내보인다. 취임 직후 할 일과 1년 이내 할 일, 임기 내 마칠 일, 여러 임기를 거쳐야 할 일을 망라한다. 종합선물 세트처럼. 인수위에서 이들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 일에 몰두한다. 두어 달 뒤를 기점으로 하는 나라의 미래상을 마련한다. 현안은 현직 대통령과 정부가 맡아서 처리한다. 물론 당선인과 상의하지만.
인선의 큰 그림은 미리 그려놓는다. 선거를 치르면서 상황이 달라지기도 한다. 검증 과정에서 인선 틀이 바뀌기도 한다. 인수위 때 이를 정리한다. 인수위를 거쳐 일의 맥락을 아는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당에 포진한다. 당·정·청의 모세혈관 역할을 한다. 국민 지지는 높다. 재난급 상황만 발발하지 않으면 초반 국정은 잘 돌아간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수위를 못 열자 대체 방안을 마련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를 꾸렸다. 대통령령을 제정, 5월 22일 자문위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은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7월 15일까지 운영했다.
'그럼, 별문제는 없던 것이 아니냐?' 아니다. 일이 엉켰다. 모든 일이 청와대로 몰렸다. 국정과제를 정하는 일도 실시간 속보처럼 진행됐다. 긴 호흡으로 봐야 할 것은 우선순위에서 뒤처졌다. 문도 못 닫고 출발한 버스라고 한 이유다.
인수위 안에는 함정이 있다. '내부 정치'다. 필연이다. 인수위는 태동한 권력의 틀을 짜는 곳이다. 여권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안팎에 모인다. 당선인과 인수위원장이 일의 가르마를 잘 타야 한다.
안 그랬다가 '내 어젠다가 더 중요하다, 내 사람이 그 자리에 더 낫다'라는 식의 다툼이 벌어진다. 심하면 대통령 임기 중 가장 중요한 첫해를 허비한다. 문재인 정부는 인수위가 없으니, 이마저 없거나 적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홍보 기획비서관으로 임명돼 처음 출근한 날이 5월 17일이다. 일주일 먼저 와 있던 행정관들이 업무를 보고했다. 직전 정부 비서관실 매뉴얼이라고 내민 보고서는 A4용지 두 장짜리. 언론 정책, 국정 홍보, 홍보수석실 업무 조정 등이었다.
보고서에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었다. 가격과 음식사진조차 없는 식당 메뉴판 같았다. 인수위가 있었다면 비서관실 과제가 정리돼 있었을 것이다. 주요 과제의 선후, 대통령 당선인 지시 사항, 여당과 논의 내용 등이다.
문재인 정부 첫해에는 국정 홍보비서관이 없었다. 홍보 기획과 국정 홍보 일을 모두 우리 방에서 했다. 어떤 날은 내게 참석하라고 통보된 회의가 14개였다. 나는 분신술을 못 한다. 몇몇 회의에는 불참 통지하거나 담당 행정관을 보냈다. 이따금 수석이나 비서관이 섭섭해했다. "우리 일은 중요하지 않으냐?" 그건 아니었지만, 선택해야 했다. 무슨 일이 급한지.
우리 방 일도 쌓여갔다. 진도가 잘 안 나갔다. 우선순위를 정했다. 인선이 시급했다. 홍보 기획비서관실은 언론 관련 기관을 담당했다. 가장 주목받는 자리가 방송통신위원장이다. 방송과 통신이라는 두 분야의 정책과 제도를 좌우한다.
방통위원장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공영 방송사 사장을 골라 앉힐 수 있다. 언론의 색깔과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 소위 '방송 장악'의 핵심적인 자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나 기재부 장관 못지않게 관심을 받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측근 최시중씨를 임기 첫 방통위원장에 앉혔다. 박근혜 대통령도 친박계 인사인 이경재 전 의원을 앉혔다. 방통위원장 임명할 때만 되면 국회에서는 청문회와 청문 보고서 채택을 놓고 난리가 났다.
임기 첫 방통위원장 후보군을 윤영찬 국민소통 수석과 협의했다. 윤 수석이 문 대통령께 보고했다. 한 달여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2017년 7월 첫 방통위원장 후보가 지명됐다. 이효성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다. 그는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방송 개혁 문제에 천착해 왔다.
여당에서 문의 전화가 왔다. 항의, 질책이 반쯤 섞여 있었다. "우리 사람이냐?"
야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으로 언론과 방송을 염두에 둔 코드인사'라고 비판했다. 대통령 측근이나 캠프 출신 인사가 지명됐으면 어땠을까. '노골적인 방송 장악 의도'라면서 반발 강도를 높였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민주당 정부에 뿌리내린 언론과 문화 부문의 원칙이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누구도 대놓고 '언론을 장악하고 문화 전쟁을 벌이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원칙을 말하기는 쉽다. 실천하기가 힘들다. 안하면 손해 보는 듯할 때 더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밀고 나갔다.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 표명에서 한 발 더 나갔다. '불간섭'을 선언했다.
'불간섭' 공표한 문 대통령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