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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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홍(yoon4me)등록 2023.10.04 13:23
'돈쭐 낸다' 는 말이 있다. '돈쭐' 이라는 신조어의 나이는 겨우 한두살 쯤 되는 것 같은데 벌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역시 돈의 힘은 무섭다. 어느 치킨집 사장이 돈 없는 아이에게 무료로 치킨을 먹도록 해 준 착한 일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어 돈쭐을 낸 것이 돈쭐의 시초이던가?

영국 사람들이 돈쭐 내는 방법은 다르다. 얼굴없는 화가 또는 게릴라 화가로 알려진 뱅크시라는 괴짜 예술가가 어느집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이 집은 아주 가파른 언덕길에 있는 집인데 뱅크시는 이 집 담벼락에 어느 노인이 재채기 하는 그림으로 낙서를 했다. 낙서를 하기 전에 5억원 정도 하던 집인데 뱅크시가 낙서를 한 후 72억원 정도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크게 돈쭐난 케이스다.

 

정림사지오층석탑 ⓒ 윤재홍

 

옛날에는 낙서가 돈쭐이 아니라 자랑질 역할을 했던것 같다.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있는 오래된 낙서를 보자. 서기 660년 쓴 낙서니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낙서라고 할 수 있다. 백제를 침공한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소정방이 전쟁을 마치고 본국인 당나라고 귀국하기 전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랜드마크인 오층석탑에 자기의 전공을 기록하며 자랑질을 한 것이다.


 

석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전공기록 - 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濟國碑銘) ⓒ 윤재홍

 

이 낙서는  '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濟國碑銘)' 으로 시작하여  '당현경 5년 (660년) 8월15일'로 마무리 되어 있다. 폰트 4.5cm 크기의 글씨로 한 줄에 16자 또는 18자씩 총 117줄의 기록이 석탑 1층의 4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석조 - 국립부여박물관 ⓒ 윤재홍

 
소정방은 같은 내용의 낙서를 대형 돌항아리에도 새겨 놓았는데, 이 돌 항아리(석조)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묵직한 존재감과 단순미를 겸비한 이 돌 항아리는 1400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미디어아트 스크린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낙화암. 송시열의 글씨인데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고란사쪽으로 가면서 볼 수 있다. ⓒ 윤재홍

 
낙화암 절벽에 새겨진 이 글씨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의 낙서다. 효종대왕의 스승이었던 우암은 왕 보다도 실권이 많았던 정치가였다고 한다.  우암은 부여에 자주 내려왔는데 부여 현감이었던 형이 부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암은 부여에 올때마다 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바로 '구들바위'를 찾는 일이었다.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제왕이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왕흥사에 예불 드리러 갈때, 강가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전에 우선 강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 왕흥사를 향해 부처님께 절을 했다. 이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 졌는데 바위가 온돌방의 구들돌 처럼 따뜻해 졌다고 하여 이 바위를 '구들바위', 혹은 스스로 따뜻해 지는 바위라는 의미로 '자온대(自溫臺)'라고 했다."

그런데, 이 구들바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백마강변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지만 어느 바위가 구들바위인지는 우암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암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나보다.

'나같이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구들바위를 찾았는데 아직도 어느 바위가 구들바위인지 모르겠구나... 흠.., 그렇다면 … 저 많은 바위 중에 내가 하나를 지목하여 구들바위라고 하면 그게 바로 구들바위 아니겠는가?'

 

바위 중앙에 빨간 색칠한 것이 송시열이 쓴 '자온대'라는 글씨다. 접근성이 어려워 사진찍기가 어렵다. ⓒ 윤재홍

 

하여, 우암은 백마강 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를 지목하고 '이게 그 구들바위다' 라는 뜻으로 이 바위에「자온대(自溫臺)」라고 새겼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그저 그런줄 알거라!' – 자만심이 오만함으로 미끌어지는 것은 이렇게 쉬운 일인가보다. 돈쭐낼 일이 아니라 혼쭐낼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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