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6월 23일 자 <동아일보> 기사 '시인 김용제씨 별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가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냈는지는 그의 작품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1943년 8월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란 시에서는 일본군에 끌려가는 청년들을 묘사하면서 "기쁜 눈물에 말이 많지 않았다/ '간다! 갑니다' 하고만/ '갔다 온다'곤 하지 않았다"라고 읊었다. 끌려가는 한국 청년들이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작품이다. 그런 식으로 강제징병 대상자들에게 메시지를 암시했던 것이다.
1942년 2월에 발표한 '소부(少婦)에게'란 시에는 "남편이 총 잡으면 슬픔 없이 환송을 노래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끌려가는 남편들뿐 아니라 배웅하는 젊은 아내들의 의식에까지 군국주의 충성심을 퍼트리려는 의도를 갖고 시를 썼던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문인들과 달리 친일 조직의 실무자로도 왕성하게 활약했다. 국민문화연구소 이사 겸 출판부장, 동양지광사 사업부장·편집부장, 조선문인협회 상무, 총독부 학무국 파견원 등등의 경력을 남겼다. 일본을 위해 글도 많이 쓰고 각종 단체의 실무도 왕성하게 처리했으니, 친일 재산도 그만큼 축적했으리라 볼 수 있다. 고학 시절의 생활력이 친일에도 반영된 것이다.
김용제가 일본어 상용화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어학 및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학하면서 일본 유학을 한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1943년 3월 21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국어문예총독상 수상 소감에서 "처음부터 국어로 문학을 시작한 동경 시절 이래 15년 동안"을 언급하면서 감격스러워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의 청년기 고생은 일본의 세계침략을 위해 활용된 셈이다.
그의 해방 이후 행적은 충성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1949년에 친일청산 기관인 국회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일을 설명한 직후에 "1951년 6·25전쟁 중 김해에서 미군 정보기관에 초빙되어 서울로 와서 심리작전·흑색선전의 책임자로 참전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일제의 심리전·선전전 기술자였던 그가 미군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그 역시 자신의 친일이 어느 정도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1978년 8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산문 '고백적 친일문학론'과 1993년 8월 일본의 시문학 동인지인 <자오선>에 발표한 소설 형식의 수기 <환상>을 통해 자신의 친일은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본인의 주장일 뿐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알려준다.
김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은 85세 때인 1994년 6월 22일이다. 일본어 상용화에 협력하면서 동족을 징용·징병 등으로 내몬 반민족행위자였지만,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시인 김용제 씨 별세'는 "김씨는 민족시·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호평했고, 같은 제목으로 같은 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는 "김씨는 일제하에 민족시 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어와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 그런 평가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1990년대 중반에 그렇게 죽었다. 동료 문인들이 그의 친일을 적극 비판했다면, 해방 50년이 다 되는 시점에 그런 보도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문학계의 친일청산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김용제의 죽음이 잘 보여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