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모습.
자료사진
윤석열 정권이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앞세워 이승만을 띄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김구에 대한 상당한 타격이 된다. 김구는 이승만의 분단정책을 반대해 남북통합을 이루려다가 이 정권의 하수인인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승만을 띄우는 보훈부 장관의 활동이 아무 견제 없이 계속되면, 반사적으로 김구가 더욱 더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민식 장관의 활동만 김구에게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간접적이지만 굵직하고 은근하게 김구의 위상을 흠집내고 있다.
지난 8·15 경축사 때 윤 대통령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 수립 시점인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 원년으로 선언한 헌법 전문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헌법 전문을 명확히 침해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헌법 전문에 입각한 발언도 아니다. 1919년 이후에도 건국운동이 계속됐다는 발언은 1919년에 건국이 이뤄졌다는 헌법 전문을 무색게 하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존중하지 않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이승만에게 타격을 주지는 않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구는 다르다. 김구는 독립운동진영의 분열로 형해화된 임시정부의 간판을 끝끝내 지켜낸 인물이다. 김구가 임시정부 간판을 지키지 않았다면 임시정부 해방 이전에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3·1운동 6개월 뒤인 1919년 6월에 43세의 김구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됐다. 지금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비사무소 소장이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나는 안씨에게 정부 문지기를 청원했다"라고 회고했다. 임시정부 문지기나 하게 해달라고 안창호에게 당부했더니 경무국장 직을 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문지기로 시작한 김구는 임시정부를 끝끝내 지켜냈다. 임시정부 최고의 경비원 겸 정부 주석이었던 셈이다. 그는 해방 뒤에도 임시정부 주석 타이틀로 활동했다. 미국이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부정하는데도 그 직함을 사용했다. 해방 직후의 한국인들도 그 직함으로 그를 불렀다. 일례로, 1945년 11월 24일 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 바로 옆의 기사 제목은 '김구 주석 일행 23일 금의환국'이다.
임시정부의 적이 된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임시정부의 수호자였다. 김구는 해방 뒤에도 임시정부의 문지기로 살았다. 임시정부 주석 직함을 갖고 미국과 이승만의 분단 정책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가벼이 대하는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결국 김구를 폄훼하는 결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1940년에 김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했다. 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독자적 군대까지 지휘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원봉을 끌어들여 한국광복군 2인자로 만들었다. 김구가 육성한 한국광복군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된다. 헌법에 의하면, 국군은 광복군에서 태동한 조직이다.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26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국군의 기원을 해방 이후로 늦춰 잡았다. 국군이 광복 후에 태동했다고 명확히 언급했다. 한국광복군이 국군의 모체임을 부정한 셈이다.
이 발언은 건국절 발언과 맥락을 같이한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만든 한국광복군이 국군의 모체임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이 역시 김구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는다.
정권 기조와 반대되는, 김구가 상징하는 가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