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선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해산이다.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자 장경근은 자신에게 적용되었던 반민특위법에 반격을 가했다. 잘 알려진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은 그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 부의장이 체포되면서 결국 반민특위는 해체된다.
다음은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 연기다. 제헌 국회는 지방자치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선거 실시 일정을 정하도록 하였다. 제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일정에 대한 권한이 대통령에 있음을 강조, 이승만은 지방 의회 선거를 무기한으로 연기했다. '반공과 국력'을 외친 장경근은 지방 자치는 한 국가 안에 여러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정부 주도의 계몽 운동으로 국민이 정치적·도덕적으로 성숙해진 이후에야 지방 자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연기되었던 지방 선거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봄에 실시되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국회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간접 선거에서 직접 선거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모험을 계획한다. 직접 선거의 민주성을 외치며 지방 선거를 추진했고 2대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1950년대 내무부는 3번에 걸쳐 지방자치법을 수정, 점차 중앙집권적 구조로 전환시킨다.
세번째,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은 장경근의 작품이다. 당시 개헌안은 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하되 초대 대통령은 예외로 한다였다. 이승만 3선을 위한 개헌이었다. 필요한 국회 찬성표는 재적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였다. 하지만 찬성이 135표로 1표가 부족했고 국회는 부결을 선포했지만, 장경근은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0.333...'은 반올림 원칙에 의하여 버려야 한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마지막으로 장경근은 1957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식민지 전시 동원 체제인 반상회를 부활시켰다. 매월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의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집에서 한 사람씩 나와, 반상회 개최 장소로 가서 정부(내무부)가 하달한 '이달의 실천 사항'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출석부까지 있었다.
두 가지 위헌적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권리의 측면으로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을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강제성이 적용되는 의무의 측면으로,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의무였다. 야당의 빗발치는 반대에 장경근은 직접 국회에 출석했다. 그는 반상회가 '민주 여론'을 형성하는 장이 될 것이며, 정부와 국민간 대화 통로로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포장하고 밀어붙였다.
장경근의 '그럴싸한' 포장은 미국에 통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이것이 전체주의적이며 1958년 선거를 겨냥한 조치라며, 장경근의 정치적 의도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리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보고문을 작성해 미국 본국으로 보냈다.
미국 대사관 분석대로였다. 한국 사회의 여론은 반자유당으로 흘렀다. 자유당 정책위원회 핵심이었던 장경근은 결국 1960년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 경찰 국장과 도모해 3.15 부정 선거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최인규와 함께 4.19 혁명으로 체포된다. 당시 장경근과 같이 체포된 인물들로는 김형근, 이익흥, 이근직, 한희석이 있다. 이들 모두 조선 총독부의 경찰, 검사, 혹은 국민 정신총동원 운동 도연맹 책임자 등 전력이 있으며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한희석은 내무부 차관에 그쳤다. 하지만, 그는 실무 차원에서 장관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0년대부터 조선 총독부 지방 행정에 깊이 관여하였고 정부 수립 이후 내무부 지방 국장으로서 분권적 지방 자치제에 반대, 1950년대 지방자치법 개정을 직접 주도했다.
체포된 후 장경근은 지병을 핑계로 보석을 요청했고 병원 입원 후 탈출, 일본으로 밀항한다. 문자 그대로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배타고 도망가는 밀항이었다. 10년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다가, 세간의 관심의 희미해진 1970년대 한국으로 들어와 사망했다.
4.19 혁명으로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들 덕에 제헌 헌법이 구상했던 민주주의 질서도 동시에 사라졌다. 잔머리에 지나지 않았던 똑똑함 그리고 신념과 철학이 부재한 해박한 법지식에 대한민국은 신생국으로서 1950년대 반드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 민주주의 질서의 안정적 제도화를 위한 황금 기회를 날렸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