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78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경축사라기보다는 경고사에 가까웠다. 그는 36년간 한민족을 억압한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에 대해 경고장을 보내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윤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규정한 뒤, 공산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런 방식으로 광복절 경축사의 화살을 과거의 일제가 아닌 현재의 북한으로 돌렸다.
그는 북한 경제가 남한에 뒤처지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라고 공격했다.
일제가 아닌 북한으로 화살을 돌리다가 결국에는 국내 반대파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한국에서 공산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도 아니고 극소수다. '활개치고 있다'고 표현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영향력이 미미한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겨냥할 만큼 윤 대통령이 한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의도하는 것은 반대 진영을 공산전체주의로 몰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일정책이나 반인권·반민주·반노동 정책 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말한 반국가세력은 '반윤석열 세력'의 동의어와 다름없다.
윤 대통령은 과거의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다.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 극우세력에게도 경고를 보내지 않았다. 도리어 대일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국민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경고장을 띄운 모양새다. 그는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반국가세력에 대한 냉전적·대결적 태도'를 촉구했다.
우리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한다. 이런 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대일 굴욕외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반국가세력으로 몰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총독부 치하에서나 어울릴 법한 일이다.
한일연대 정당화 위해 독립운동 역사까지 활용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던 1986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 전두환은 "36년간에 걸친 망국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지금도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침략성에 대한 분노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라며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전두환도 형식적으로나마 이런 '립서비스'를 했다. 굴욕외교를 비판하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모는 윤 대통령의 태도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서기 356년에 중국 진(晋)나라가 옛 도읍인 뤄양(낙양)을 되찾은 일을 두고 진나라 역사서인 <진서>의 환온열전은 광복(光復)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1912년에 중국 한족이 만주족 청나라를 몰락시키고 중화민국을 세운 일을 두고 중국 혁명가 쑨원(손문)은 광복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처럼 광복이란 표현은 밝음의 뉘앙스를 띠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다'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번에 윤 대통령 경축사에 앞서 배우 유동근씨가 광복의 환희를 다룬 시인 이희승의 '영광뿐이다'를 낭독했다. 이 시에 "태양을 다시 보게 되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광복은 위 용례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밝게 되찾는 것'이며, 이희승이 읊은 것처럼 '태양을 다시 보는 일'이다.
광복절 경축사에는 그런 환희가 담겨야 한다. 윤 대통령은 그런 환희가 아닌 암울한 느낌을 선사했다. 한국이 한층 더 도약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식민지배 청산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는커녕 도리어 일본과의 무조건적 연대를 강조했다. 과거사를 덮어둔 채 가해자와의 연대만을 강조하며 부조리의 양산을 부추기고 있으니, 빛이 아닌 어둠이 한국 사회에 더 퍼질 수밖에 없게 됐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사 때처럼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일본을 파트너로 규정했다. 일본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며 "한일 양국은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로서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하고 교류해 나가면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을 따름이다.
이런 발언은 위안부나 강제징용(노동자 강제동원) 같은 식민지배 문제가 대략적으로라도 매듭지어진 뒤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 해결이 더욱 요원해진 마당에 '미래지향적'을 운운하는 것은 성급한 태도일 뿐 아니라 부조리 은폐에 가담하는 일이다.
윤 대통령은 한일연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독립운동의 역사까지 활용했다.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를 위한 운동이었다고 규정했다. 일본과의 연대도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했다. "정부는 출범 이후부터 자유·인권·법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안보협력과 첨단기술 협력을 적극 추진해왔습니다"라며 한미동맹과 한일 협력을 거론했다.
그의 경축사에는 독립운동과 한일 연대가 동일선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논리 구조가 담겨 있다. 그는 3·1절 기념사 때도 한미일 안보협력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그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라며 3·1운동과 한일 협력을 상호 계승관계로 규정했다.
일본 사면하고 한일연대 정당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