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위안부 드라마'는 어떻게 중도하차했나

1967년 라디오 연속극 <데이신따이>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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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songcing)등록 2023.08.14 10:27
정신대(挺身隊) 또는 위안부(慰安婦). 글자 그대로만 보면 별다른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말에 담겨 있는 실상은 더없이 잔인하고 엄중하다. 지난 과거도 그러하고, 그 역사를 아직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는 현재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염증을 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럴 수 없는 일이기에 작은 이야기 하나를 또 던져 보려 한다. 1967년에 중도하차한 라디오 연속극 <데이신따이> 이야기다.
 
1945년 해방이 된 뒤에도 식민지 역사가 남긴 상흔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반민특위'처럼 그에 대한 해결을 어떻게든 시도한 예도 있었지만, 드러내지 못하고(또는 않고) 외면한 채 그저 덮어 놓은 일들도 많았다. 조선 여성이 '정신대' 명목으로 일본군의 성적 착취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직간접적인 피해자와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해방 이후 사람들이 '정신대'라는 존재를 몰랐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기에, '정신대' 문제는 오랫동안 공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패전 직후 1940년대 후반부터 관련 소설이나 영화가 이미 나오고 있었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첫 방송 광고. '지다'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방송에서는 '진다'로 표현했다. ⓒ 동아일보사

 
한국에서 '정신대' 관련 내용이 처음 공적으로 대중 앞에 등장한 때는 해방이 되고도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1964년이었다. 동아방송 라디오 주말연속극으로 1964년 10월 24일부터 이듬해 1월 10일까지 방송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김기팔 작, 임영웅 연출)가 현재 알려져 있는 첫 작품이다. 그보다 앞선 예가 있을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제대로 공개된 바가 없다.
 
'사르빈강'은 중국과 미얀마에 걸쳐 흐르는 큰 물줄기로, 요즘은 대개 '살윈강'으로 불린다. 드라마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주인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한 조선인 친일파의 아들 마쓰모토 히데오인데, 그가 보내진 곳이 바로 일본군 침략의 서쪽 끝이었던, 사르빈강이 흐르는 미얀마(당시에는 '비루마'라 불렸다)였다.
 
드라마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가 화제작으로 호평을 받으며 종방된 뒤에는,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영화도 제작이 되었다. 영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정창화가 연출을 맡고 신영균, 남궁원, 윤일봉, 구봉서 등 인기 배우들이 출연해 1965년 9월 9일 추석 프로그램으로 개봉했다. 아카데미극장에서 5만(현재 추산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니, 흥행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이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에 주인공 주변 인물 가운데 하나로 '비루마'까지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당초 황군으로 출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주인공 마쓰모토가 민족적 각성을 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조선인 위안부'였으므로, 나름 중요한 극중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극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때문에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위안부' 자체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작품이라 하기가 아무래도 좀 어렵다.
 

<데이신따이> 첫 방송 광고. ⓒ 동아일보사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방송 이후 3년이 지나서야 첫 번째 '위안부 드라마'로 볼 수 있는 예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문제의 작품 <데이신따이>다. '정신대'의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제목에 쓴 <데이신따이>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와 마찬가지로 김기팔이 극본을 맡았고, 안평선 연출로 1967년 10월 10일부터 동아방송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이색'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게다가 당시엔 참고 자료도 많지 않은 소재였기에, 드라마 <데이신따이>는 작가나 연출가에게 각별한 의미와 부담이 있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연출가 안평선은 지난 2018년 구술에서 <데이신따이>를 준비하며 느꼈던 어려움과 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967년도에 우리가 위안부 얘기를, 위안부 말도 없고 자료가 요만큼도 없을 때야. 신문기사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어려서 집에서 듣던 얘기, 또 그 다음에 신문에 이런 거 안 났을 때니까 이게 굉장히, 일찍 기획을 한 거예요. 그러고 김기팔 씨가 평양, 평양 출생인데 잘 몰라요, 그걸.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서, 종로에 살았기 때문에 그 여자들 막 빨리 시집보낼라 그러고 이런 걸 다 봤다고. 그래서 그것까지 해서 이걸 좀 아 이번에 좀 획기적인 고발, 일제를 고발하는 라디오 드라마가 나왔다고 그러고 막 흥분해가지고 다 우리가 좋다고 다 그랬었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로 '정신대' 이야기를 직접 거론한 1991년 화제작 <여명의 눈동자>도 그러했지만, '위안부'에 대한 묘사는 어쩔 수 없이 선정성 시비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그래도 <데이신따이>는 화면 없이 소리로만 진행되는 라디오 드라마였기에, 관계자들은 그런 논란을 큰 무리 없이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연출가 안평선도 "졸병들이 줄 늘어서서 뭐 시시덕거리고 이것 정도 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작품의 초점이 선정적 장면 묘사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식으로, 지엽적 논란이 결국 드라마 중도하차로 이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평일 밤에 전파를 탔던 일일연속극 <데이신따이>는 방송 시작 한 달여 만인 11월 14일에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동아방송은 조기 종방에 더해 사과방송까지 내보내야 했다.
 
중도하차에 대한 책임으로 '견책' 징계를 받기도 했던 안평선은 2018년 구술에서 방송 중단 결정 과정에 관여했던 인물로 두 사람을 거론한 바 있다. 당시 방송윤리위원으로 드라마 심의에 참여했던 수필가 조경희가 자신에게 먼저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위원이 문제를 제기하며 결정을 주도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경희의 말을 듣고 경위를 수소문해 본 안평선은 문제의 '다른 위원'이 박아무개였다고 밝혔는데, 그 짐작은 얼마 전 자료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조경희가 참여했던 심의기구는 박정희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6월에 발족한 방송윤리위원회였다. 주요 방송사 추천인과 각 분야 전문가로 위원진을 구성해 방송 사후 심의, 즉 검열을 진행한 방송윤리위원회는 매달 정례회의를 열어 안건을 처리했는데, 1967년 11월 7일 정례회의 회의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동아방송 연속방송극 "데이신따이"의 일어를 사용한 제목, 외설적인 표현 등으로 해당 방송국에 공개사과 작가에게는 집필정지 처분하기로. 박용구 위원의 동의와 조경희 위원 찬성이 있었으나, 더 재료 수집과 신중을 기하는 동시 해당국 대표의 참석하에 재토의 결정하기로 함.
 
일본어로 된 제목을 사용하고 외설적인 표현이 있다는 것이 <데이신따이> 제재의 이유였다는 점, 그리고 박용구와 조경희 두 사람이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된다. 11월 7일 회의에 앞서 11월 3일에는 소심의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 조경희는 빠지고 박용구 외 두 사람만 참석한 것이 확인되므로, 조경희의 주장처럼 사실상 박용구가 상황 전반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1967년 11월 7일 방송윤리위원회 회의록. ⓒ 이준희

 
안평선과 마찬가지로 박용구도 2003년에 구술 기록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의 구술에는 <데이신따이>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공연예술 각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원로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용구는, 이승만 정권 시절 용공 혐의를 견디다 못해 1949년 12월부터 1960년 6월까지 일본에서 망명객으로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드라마 <데이신따이>에 대해 왜 그렇게 강경한 태도를 취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1967년 1월부터 박용구가 방송윤리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동아방송의 추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데이신따이> 중도하차와 관련해 역시 '위안부' 내용을 다룬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어떠했는지도 살펴보았으나, 방송윤리위원회 회의록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방송윤리위원회에서 매월 간행한 기관지에 자료가 있을까 싶어 찾아보기도 했지만, 월간 <방송윤리>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종방 이후에 창간되었기 때문에 결국 별다른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
 
<데이신따이> 당시에는 기관지 <방송윤리>가 발간되고 있었으므로 추가 조사를 위해 소장처인 국회도서관에 열람 문의를 했으나, 자료가 등록은 되어 있는데 실물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황당한 답변만 듣고 말았다. 발견하면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몇 달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안평선의 구술과 방송윤리위원회 회의록만이 당시 상황을 전해 주는 자료로 남은 셈이다.
 
'정신대' 또는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엄중한 이유는 그것이 한 번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에도 베트남전쟁 때에도 여성을 성적 착취 대상으로 삼은 사실이 엄연히 있었다. 한국인은 한편으로 피해자이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 같은 민족에 대한 가해방조자이자 다른 민족에 대한 가해자이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 대해 '물타기'라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런 태도는 아무리 봐도 '내로남불'일 뿐이다.
 
1967년 '위안부 드라마' <데이신따이>의 중도하차는 표면적으로 박용구라는 개인의 강경한 고집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아직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 사회 전반, 특히 주류 남성 사회가 예나 지금이나 떨치지 못하고 있는 콤플렉스가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금 나는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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