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위키미디어 공용
1898년 2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한 윤치영은 '친일 명문가' 출신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윤치영 편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라며 "남작 윤웅렬은 백부"라고 소개한다.
이 사전의 윤치오 편은 윤치오의 부인이 중추원 참의 김윤정의 딸이라고 한 뒤 "차남 윤명선은 만주국 이사관을 지냈으며, 둘째 며느리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갑순의 장녀"라고 말한다. 친일파들이 뒤엉킨 집안이었던 것이다.
윤치영은 교동보통학교·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세이소쿠영어학교·와세다대학·프린스턴대학·헤이스팅스대학·콜럼비아대학·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조지워싱턴대학·아메리칸대학을 거쳤다. 그는 학교들과만 친한 게 아니라 사람들과도 친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 사교부장과 재일조선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를 지냈고,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재미한인유학생총회 사교부장을 지냈다.
'사교' 타이틀이 많은 그의 인간관계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승만과의 친분이다.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오영섭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이승만연구원의 모태) 연구교수가 2008년 8월 <한국사 시민강좌>에 기고한 '윤치영,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공신'은 "윤치영은 1923년 하와이 체류 때부터 건국 직후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다고 평한다.
윤치영은 교동보통학교 시절인 10대 초반부터 기독교청년회(YMCA)를 매개로 23세 위인 이승만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그의 미국 체류 기간 일부는 하와이 체류 기간이었다. 하와이에 머문 것은 이승만의 요청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조성한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달하고 이승만의 사조직에서 실무를 처리하며 출판물을 발행하는 일들을 그는 해냈다.
윤치영이 이승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29세 때인 1927년 1월 7일에 보낸 서한에서도 증명된다. 위 논문에 따르면 윤치영은 그 편지에 "금일의 각하의 취하실 길은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즉위한 날이 1926년 12월 25일이다. 위 편지는 그로부터 13일 뒤에 작성됐다. 세계인들이 천황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던 시기에 이승만더러 천황이 되시라고 권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이승만의 '광팬'이다.
증거가 확실한 친일
그런 광팬이 '천황의 나라'로 전향했다. 37세 때인 1935년 5월에 귀국한 뒤 이승만 계열인 흥업구락부에서 간사로 일하다가 1938년 5월에 체포된 그는 그해 9월 3일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이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공안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에 그의 친일 전향이 이뤄진 것이다.
그는 이승만을 따를 때처럼 일본제국주의도 열심히 따랐다. 침략전쟁 자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하기 위한 가두판매 활동에도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판매대에 참여"했다고 기술한다. 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도 되고,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도 됐다.
학교 이력만으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런 풍요 위에 약간의 친일 재산이 추가로 더해졌다. 금액이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친일 기고를 통해 어느 정도의 수익이 생겨났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연재한 이력도 있고, <청년> 같은 데에 기고한 이력도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40년 1월호 <청년>에 기고한 글에서는 "우리는 한마음 한 뜻으로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하야 신성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황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합니다"라고 기원했다.
그는 친일 강연을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친일 기고까지 했다. 그의 친일은 증거가 확실한 친일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력을 숨기기 힘든 친일파였는데도, 이승만은 50세 된 그를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초대 내각에 대한 관심이 뜨겁던 1948년 8월 3일의 일이다.
그것은 파격적인 기용이었다. 그해 8월 8일 자 <경향신문>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2)'는 "내무에 조병옥이냐 장택상이냐? 몇 날 동안을 두고 항간에서는 멋대로들 떠드러 오다가 막상 조각 뚜껑을 여는 마당에 조·장 양씨가 모두 미끄런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라며 "더구나 기상천외한 윤치영 씨가 임명되었다는 호방(呼榜)을 듯고 나선 두 번 놀랐다"고 전했다.
이승만 초대 내각의 첫째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