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발리와이의 시초, 올드 포그혼. 이제 더 이상 이 맥주를 마실 수 없는 건, 커다란 슬픔이다.
윤한샘
하지만 크래프트 맥주 문화에 대한 삿포로의 무지는 조금씩 문제를 일으켰다. 직원들은 삿포로가 오랫동안 앵커의 가치를 지켜준 맥주에 투자하기보다 대량 생산을 통한 라거 생산을 중요시했다고 폭로했다.
2021년 로고 리브랜딩은 앵커 지지자들의 결정적인 반감을 불러오기도 했다. 정체성이 사라진 로고가 박힌 캔에 담긴 앵커 맥주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골드러시를 상징하는 스팀비어와 크래프트 맥주의 토대가 된 리버티 에일의 아우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삿포로는 앵커의 가치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앵커는 높은 수익을 보장해 주는 브랜드가 아니다. 3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의 매출은 미국 시장에서 크지 않지만, 그 안에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숨어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투자했다면 삿포로는 놀라운 팬덤과 업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삿포로라는 브랜드로 자연스럽게 전이됐을 것이다.
삿포로는 앵커의 폐쇄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오히려 팬데믹이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것 아니었을까? 앵커 직원들의 반발과 매출 하락은 삿포로에 떼고 싶은 혹이었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삿포로는 인수 6년 만에 재매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전통과 크래프트라는 양 날개를 가진 앵커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 주는 행태다.
프리츠 메이텍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안 된다. 앵커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는 펍과 바 관계자와 맥주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시에라 네바다 설립자 켄 그로스맨은 지역지 <에스에프게이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나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었던 앵커가 문을 닫는다는 것에 큰 슬픔을 느낀다'고 전했다. 스팀비어에 매료되어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 발을 디딘 브루클린 브루어리의 헤드 브루어 개릿 올리버 또한 '앵커는 크래프트 맥주의 대부였다'며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비슷한 일이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있었다. 1980년부터 을지로를 지켜왔던 맥주 노포, 오비베어다. 철거 명령으로 을지로에서 쫓겨난 오비베어는 다행히 수많은 응원과 지지 덕에 홍대에서 재오픈할 수 있었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을지 오비베어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초창기 간판과 파란색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브랜드를 떠나 이것이 맥주가 가지는 문화적인 힘이다. 오비베어처럼 앵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는 작은 응원이 나비 효과가 되길, 내가 마신 앵커 리버티 에일과 올드 포그혼이 마지막이 아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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