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가 2022년 9월 경북 포항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1년 동안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강사로 일한 정 작가는 2022년 4월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 지급 소송을 제기했다.
김성욱
2023년 1월 27일 서울고등법원은 모 대학교 시간강사들이 퇴직금과 함께 주휴수당과 연차수당, 노동절 수당을 지급해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시간강사의 근로시간은 계약서에 명시된 강의시간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시간강사는 근로계약서를 쓸 당시에 계약서에 명시된 강의시간을 보고 현실에 맞지 않을 경우 학교 측에 수정을 요청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간강사 본인이 강의시간만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한 것이니 강의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 시험 출제와 채점, 성적 산출과 입력 등에 소요되는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사회 안에서 계급과 권력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판결이라 할 수 있다. "공짜로 일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그랬어"와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 사이에서 비정규직은 언제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서울고등법원의 위와 같은 판결이 내려진 이후 모 국립대는 퇴직금 소송 중이던 강사에게 반소를 제기했다. 줬던 퇴직금을 도로 뱉어내라는 것이다. 시간강사는 퇴직금도 수당도 받을 자격이 없는 초단시간 근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의 퇴직금 소송은 다행히 이 정도로 절망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판사님의 요청에 따라 나는 나의 업무가 정규직 교수의 업무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고법 판결에 따르면 시간강사는 행정업무를 하지 않고 학생지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정규직 교수보다 절대적인 근로시간이 적다고 한다.
회의도 들어가고 학생지도도 하는데...
나는 한 학기에 최소 한 번, 퇴직할 무렵에는 한 학기에 두 번씩 학과 어학수업 회의에 참여했다. 이 회의에는 교수와 강사가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나는 이 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했다. 회의록은 학과가 어학수업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증거자료로 문과대학에 제출되었다.
다른 학과들과 통합하여 새로운 대학원 과정을 개발하고 한국연구재단에 이 새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기 위한 지원금을 신청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서울고등법원이 생각하는 '학과 행정업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정기적으로 학과 행정에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다. 연세대학교 측이 처음 제출한 준비서면에 따르면 내가 재능이 너무 많고 너무 똑똑해서 강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강의 시간이 되면 아무 말이나 하고, 그래서 시간이 남아도니까 "강의와 상관없는"(상관있다) 학술단체 간사도 하고 "강의와 상관없는" 학술논문도 썼다고 한다(학술논문 내용을 수업시간에 강의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학과 회의에 재미로 참석하고 취미로 지원금 신청서나 회의록을 쓴 게 아니다. 교수가 포함된 단체 메일이 와서 이런저런 회의 참석하라고 하니까 참석한 것이고 회의록을 네가 쓰라고 교수가 시키니까 쓴 것이다.
학생 지도에 관해서 서울고법 재판부에 내가 말하고 싶은 사실은 연세대학교 강사 재임용 심사 평정표에 '학생지도' 항목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학생지도 활동 항목은 '강의활동 평정(20점)' 아래 들어가 있으며 전체 100점 중에서 10점을 차지한다.
재임용 평정과 관계없이, 학생이 수업 내용이나 진로에 대해 질문하거나 상담을 청하는데 "나는 강사니까 교수한테 가서 질문하라"고 대답하는 강사는 없다. 자기 수업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그 수업의 강의자에게 있고, 자기 수업의 수강생이 질문을 하면 교수든 강사든 그 수업을 강의하는 사람이 답변해야 한다.
나도 학생의 질문에는 일상적으로 답변했고, 외부 장학금 신청이나 유학 또는 대학원 진학을 위한 추천서도 한국어와 외국어로 여러 번 써 주었고, 국내 대학원에 진학할지 취업할지 외국으로 유학 가야 할지 고민하는 학생에게 진로 상담도 수없이 해 주었다. 이러한 업무는 주로 전자메일로 진행했으므로 문서 자료가 전부 남아 있다.
나에게 불리한 정황은 일주일에 몇 번,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렇게 정해놓은 의무적인 학생 상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강사에게 학생을 상담할 공간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사 공동연구실은 불특정 다수의 여러 강사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요일과 시간을 정해놓고 나 혼자 독점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상담하는 중에 다른 선생님(들)이 연구실을 써야 하는 경우, 혹은 다른 선생님(들)이 자기 학생을 상담해야 할 경우, 서로 방해가 되기도 하고 학생의 개인정보나 사생활이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공간을 주지 않고, 학생도 강사도 안심하고 지도를 하고 지도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는 최선을 다해 가능한 방식으로 학생 지도를 했는데, 너는 학생 지도를 하지 않았으니 지도한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인정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강사에 대한 차별이다.
학부생만 지도한 것도 아니다. 나는 대학원생 석사논문 지도도 해 보았고 박사학위 후보자가 제출한 박사논문을 읽고 평가하는 업무도 했다. 석사논문 지도의 경우 정식으로 논문 지도 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서 논문 진행 과정을 관리했고, 논문을 읽고 논지 전개과정을 점검하고 오탈자도 잡아냈다. 각주와 미주 형식도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로 각각 가르쳐주고, 각주와 미주에 이탤릭이 제대로 적용됐는지 쪽수와 저자 이름은 제대로 썼는지도 점검했다. 러시아에 갔을 때 학생에게 필요한 연구자료도 복사해다 주고, 논문 심사 의견서도 썼다. 이 모든 과정은 학생과 주고받은 메일과 학교에 제출한 논문심사 의견서에 서면증거로 남아 있다.
박사논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교수가 어느 날 자기 연구실로 불러서 "이걸 좀 읽어봐라" 하면서 출력해서 제본한 종이 논문을 던져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싫어요, 안 해요" 할 수 없어서 떠맡았다. 그 종이 논문은 읽고 코멘트를 써서 교수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증거가 없다.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그랬다고 지금 와서 후회하고 있다. 내가 언제나 학교에 소송을 걸 생각으로 이를 갈면서 12년 강사생활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때는 소송을 위한 증거를 남긴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교수가 시키면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