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행동이 2021년 6월 16일 오전 서울역 앞 광장에서 '홈리스 코로나19 예방접종 실태조사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있을 당시, 한 노숙인이 서울역 앞에서 누워있다.
이희훈
행복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지향'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고통과 실패는 실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삶에서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절망과 좌절일 뿐이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단 한가지의 이유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 단 하나의 이유란 아마 '희망'일 것이다. 행복을 지향하는 것. 그러니 희망이란 아직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말인즉슨, 행복이란 불행과 절망을 딛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것.
"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희망과 긍정의 인플레이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마치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을 것처럼, 긍정적으로 살기만 하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집단 최면에 빠져있다. 이 집단 최면의 부작용은 절망을 부정하고 실패를 '낙오'라고 여기는 일이다. 그보다는 희망이란 절망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잊는 일이다.
그리고 절망과 불행 위에서 희망과 행복을 향해 가는 그 수많은 '과정'과 '양태'를 그저 실패와 낙오라고 단순히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화폐를 찍어내기만 해서 화폐가 가치 없어진 사회처럼, 희망과 행복을 단순히 공산품처럼 찍어내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짜 희망과 행복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김혜진의 <중앙역>엔 저마다의 불행이 난무한다. 나의 부박한 문장으론 그것을 그저 '불행'이란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삶의 다양한 양태'에 가깝다. 삶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의 불행과 좌절을 긍정하는 것에서 부터라면, 어쩌면 행과 불행이란 그저 수없이 엮이는 삶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순간들 중 하나일 것이다.
<중앙역>의 화자인 '나'는 어느 도시 중앙역에서 노숙하는 노숙인이다. 세상에서 도태되고 좌절한 그는 그 불행의 저수지 같은 중앙역 광장에 퇴적된다. 그는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불행의 저수지 같은 곳이 삶의 최하단부일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곳에서 사랑이나 희망 같은 말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버리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것'에, 그러니까 희망이나 사랑으로 이름붙은 마음이나, 노숙이나 재활 혹은 부유나 빈곤으로 규정한 삶의 방식이나 혹은 사람 그자체를 비로소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밑바닥 밑엔 밑바닥이, 사랑보다 깊은 곳엔 상처가. 우리는 그것들의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이름을 붙여왔던 것일까. 소설 <중앙역>의 주인공 나와 그녀는 소설 속에 단 한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 그 자체가 규정의 시작이기 때문일까.
행과 불행의 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