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의 교육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가기

검토 완료

김현수(minuchin)등록 2023.06.16 10:22
 
< 팬데믹 이후의 교육 : 방향 감각을 찾아서 >
 
거트 비에스타 강의, 김현수 정리
 
* 2022.2.18. 온라인 상으로 이루어진 강의를 강의녹취록에 기반해 성장학교 별 교장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김현수가 재정리하였습니다. 이 자료의 게재에 대해서는 거트 비에스타 선생님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 교육을 끌고 가려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교육의 방향 감각 지키기

- 가르치는 일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1. 팬데믹의 위기가 알려준 것
2. 교사는 위기 앞에서 아이들을 깨울 수 있을 것인가?
3. 팬데믹 이후 교육의 아젠다 잡기에 관하여
4. 판데믹 이후 아젠다의 도구가 된 교사들 : 가르침을 잃다
5. 교육과 가르침의 통합성에 대한 탐험
1) 교육 그 자체의 핵심은 교육능력에 있는 것인가?
2) 교육 그 자체의 핵심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에 있는가?
3) 플라톤, 올바른 방향을 보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4) 가르친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빼앗는 예술
5) 교육에는 세 번째 등장하는 것이 있다. - 교육의 3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6) 교육이 단지 지적인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7) 통제 가능하다는 착각 그리고 통제가 교육이라는 착각
8) 교육적 차이, 가르침이 모두 배움이 되지는 않는다
9) 완벽한 교육을 하면 학생의 자리는 없어진다
10) 가리킴의 이중성
11) 가리킴에 대한 교사로서의 입장
12) 탐험의 종착지 : 교육의 중심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팬데믹 이후 각 나라들의 교육, 과연 교육인가?

안녕하세요.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이것 참 긴장되는군요. 어색하고요. 아무래도 제가 말하는 걸 녹화하는 중이라서 말이죠. 여러분이 나중에 이걸 보게 되시는 거고요. 코로나로 인하여 아직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오겠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에서 만나 큰 회의에서 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제 이야기를 다 못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밖에 주어지지 않아서요. 하지만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오늘 강의의 주제는 <펜데믹 이후의 교육 : 방향 감각을 찾아서>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제가 무엇을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꽤 어려웠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생각들, 화제들이 아주 많아요.
 
교육을 끌고 가려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교육의 방향 감각 지키기
 
제 핵심적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코로나 시기에 알게 된 결핍에 대한 제 아이디어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펜데믹이 우리의 사적인 일상, 직장 생활을 파괴해나간 모습을 목격하며 알게 된 것들을요.
이제 일상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코로나 전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말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대로 따라 쓰기만 되는 모든 종류의 해결책이 생겼지요. 의도는 좋아요.
그러나 교육 문제가 흔히 그렇듯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육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교육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질 것인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교육 문제가 언제나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있는데요. 교사는 교육하는 사람으로서 방향 감각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저기 온갖 군데에서 우리를 끌고 가려 하니까요. 바로 그 문제를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가르치는 일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가 방향 감각을 지킬 수 있으려면 그것은 결국 교사로서 우리의 직업에서 실제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 실제로 가르치는 일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가르치는 일에 대해 제가 숙고한 내용 중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1. 팬데믹의 위기가 알려준 것
 
이번 강연은 팬데믹에 대한 것입니다. 복잡한 문제입니다. 모두가 팬데믹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커다란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육도 위기라고 하지요
저는 '위기'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그리스어에서 '위기'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풍부한 의미를 살펴볼까요. 위기는 혼돈의 상태가 아닙니다. 위기는 전환점이 다가오는 것이고 전환점은 항상 판단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위기도 한 가지 면에서는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펜데믹은 많은 곳을 방문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 의료적 차원에서 횡행하는 많은 불평등을 발견했습니다.
둘째, 배움의 자원이 학생들 사이에 얼마나 불평등한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팬데믹은 정부의 일부 정책이 무의미하고 의료 정책 중 상당히 무의미한 것도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넷째, 학습 손실에 대해서도 큰 불평등이 있습니다. 팬데믹 동안 공부할 수 없었던 흑인 학생들이 진도를 따라잡는데는 많은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불평등이 존재함을 알고 있죠, 우리는 정책 역시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아요. 늘 이 문제를 다루었던 저에게 정책은 해결책이기보다 문제이지요.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어떤 위기들은 관심을 끄는 데 반해 다른 큰 문제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요. 빈곤, 기아, 불평등, 기후 위기 같은 큰 문제들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계속 잊어버리고 있어요. 이번 팬데믹이 더 가까운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교사는 위기 앞에서 아이들을 깨울 수 있을 것인가?
 
위기에 대한 관심은 미학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학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 관련된 학문입니다. 무엇이 가시적인지, 무엇이 우리의 지각 영역에 들어오는지, 질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들은 우리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교사가 하는 일 중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또 새로운 세대가, 관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어있게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교육은 마취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마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은 당신의 교육이나 학생들을 무시하고 다른 일에 마취를 시키는 일입니다.
 
"그냥 시험에 집중하세요.
그냥 학업에 집중하세요.
소란은 잊고 여기에만 집중하세요."
 
심지어 이런 마취적 교육이 효과가 있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학생들이 깨어있고 주의를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 세상에 대해 면역이 되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내게 될 것입니다. 위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팬데믹 이후 교육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바로 다음 문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사로서 학생들이 깨어있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학생들을 깨우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인가?"
 
이 질문은 매우 크고 중요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조금 가볍게 서로 돕는 것, 새로운 세대를 돕는 것, 우리 학생들이 세상을 위해 깨어 있도록 돕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면 아주 무거운 질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말이죠.
팬데믹 이후 마취의 교육과 깨어나게 하는 교육 사이에서
우리를 학생들을 깨어있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교육적 노력 어디에서 그런 실천을 해야할까요?
 
3. 팬데믹 이후 교육의 아젠다 잡기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학교 교육의 아젠다 agenda를 팬데믹 시기에 새롭게 잡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펜데믹 시대 학교의 새로운 의제에 관해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위한 의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협소한 의제라고 할 만한 것들부터 거시적인 것까지 다양한 의제를 사람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관한 의제는 "학교는 경제적 생산성을 높이거나, 국가주의적 가치를 주입하거나, 사회 질서를 창출하거나, 특정 국가가 안정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도록 하기 위해 있다" 고 하면서 제안하는 것도 있고, 또 다른 차원에서 교육은 "학생들의 복지에 신경 쓰고, 사회 정의,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의제들의 시리즈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 자체보다 야심찬 의제에 대해서만 생각하 면 그리고 교육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교육은 아주 빠르게 일종의 도구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심을 끌게 될 질문들은 결국 학교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한 것들 뿐이겠지요.
 
4. 판데믹 이후 아젠다의 도구가 된 교사들 : 가르침을 잃다
 
많은 나라의 교육 정책과 입안자, 연구자들의 주된 고민거리는 판데믹 이후의 교육에서 어떻게 교사들이 일하도록 할까입니다. 즉 교사들에게 특수한 의제를 부과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연구자나 정책 입안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효과적인 것들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서 무엇이 효과적인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런 모든 질문들은 교육을 무언가를 생산해야 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관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이상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신을 선생님으로 여기지 도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일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교육하는 일로 여깁니다.
교육은 효과적이어야 한다고, 효과적인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 모든 말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바로 교육 그 자체의 통합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교사의 일은 실제로 통합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도구로서의 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은 교사가 하고 있는 일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이제 해야 할 더 중요한 말은 교사가 실제로 교육의 핵심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교사가 교육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저 갖가지 의제를 넘나들면서 활용되는 도구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구로 활용되는 종속적 주체가 되면 어떤 의제나 비전이 교육에 반한다고 느껴져도 반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5. 교육과 가르침의 통합성에 대한 탐험
 
이 글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통합성, 가르침의 통합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탐험입니다. 가르침 자체는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더 깊이 경험하거나 들여다보는 일 말입니다.
교육의 통합성을 위한 고민은 저의 훌륭한 동료들이 함께 오랫동안 논의해온 문제입니다. 10년 전 저도 그 작업에 작게 참여할 수 있었지요. 그 때 함께 교육 선언문을 작성해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육 선언문에서 우리는 정말로 교육을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육이 한 가지 목적만을 알기 위해 가득 차 있거나, 특정 정책을 전파하기 위한 결과이거나, 사회적 특권 신분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교육은 그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1) 교육 그 자체의 핵심은 교육능력에 있는 것인가?
 
하지만 사실, 교육 그 자체에 대한 우려는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중요한 유럽 학자 중 하나인 헤르바르트는 20년도 더 전에 이미 말했습니다. 교육은 '식민지'라고 부르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고요.
교육의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현재 교육의 현장 어디에 있나요?교육에 발을 들여놓고, 교육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진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교육에 관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헤르바르트는 예를 들어, 심리학이나 철학, 사회학의 침투를 걱정하였습니다. 교육 자체에 그 학문들이 무엇을 할지 걱정했습니다.
헤르바르트는 교육에 있어서 정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교육의 핵심 개념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교육과 가르침에 해당되는 개념으로 그는 교육능력(educability)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교육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음을,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음을 장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육 그 자체에서 기원한 어떤 핵심 개념들이 또 있을까요? 어떤 종류의 개념들이 교육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아이디어나 단어들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흥미로운 생각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2) 교육 그 자체의 핵심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에 있는가?
 
교육에 필요한 개념들을 찾는다? 그렇다면 사실 교육 바깥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핵심적인 교육 개념들을 찾는다면 "교육 그 자체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이 물음의 의미로부터 시작해야할 것입니다.
이 물음의 의미를 찾아보면서,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교육의 통합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육의 통합성에 대한 개념 중 중요한 것은 현대 독일의 교육학자 클라우스에 의해 비롯된 것들이 있습니다.
클라우스는 단순히 교육과 교육의 형태를 관찰함으로써 교육의 독특함과 가르치는 것의 독특함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육이 작동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을 통해 교육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교수법의 독특한 형태와 운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 것, 방향을 알린 것에 초점을 맞추자" 라고 말합니다.
즉 의회에서 누군가 제안하는 것은 어떤 방향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에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은 어떤 방향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쳤을 때 우리는 싸웠습니다. 싸운 이유는 방향이 달라서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제가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파워포인트는 어떤 중요점의 방향을 가리키는 일을 합니다. 클라우스는 방향을 가리키는 일, 지목하는 일이 가르침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할 것입니다.
무언가의 행위 안에 특정한 방향을 지시하지 않고 교육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의 알림, 무언가를 보게하는 것, 가리킴은 교육의 핵심입니다
 
3) 플라톤, 올바른 방향을 보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여러분이 서양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이미 플라톤의 작품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학생들의 눈에 통찰력을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교육이 우리 학생들이 확실하게 올바른 방향을 보게 만드는 것이라 말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의 시선을 잘못된 방향에서 특정 방향으로 돌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매우 지속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여기 교실 사진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면요.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선생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교실은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교실과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교실에 배치된 방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교실이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면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꽤 오래된 사진입니다. 아마도 75년 전의 교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이 낡고 구식인 교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학생들이 이런 교실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교실은 훨씬 더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현대 기술. 인터넷, 유튜브를 찾아본다면, 거기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수천 개의 비디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예시는 이케아의 의자를 조립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영상입니다. 이케아는 한국에도 매장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글로벌해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이 기본적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곳에서, 핵심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나 더 보여드릴게요. 아주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여기는 메릴랜드의 대학교입니다. 제가 일을 했었어요.
대학은 그들이 처음부터 캠퍼스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기 위해 가장 유행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이 참여해서 아주 기뻐했습니다.
제가 꽤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은 매우 포스트모던하고 세련된 건축가들이, 학생들이 앉을 수 있고, 선생님이 그들에게 교육을 하기 위한 공간을 만들 때,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 그들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매우 전통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생각을 보여주듯이 말이죠.
 
4) 가르친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빼앗는 예술
 
가르치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을 돌리는 일이거나. 그래서, 학생이라면, 이 방향을 보고, 교사의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앉아 있도록 자리가 배치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을 하나의 '기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독일의 교육 작가가 가르침을 기술한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교육은 누군가의 시선을 돌리는 기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기예'임을 증명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이 "가리키기", 이 행위의 특징에 대해 정말 흥미로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언가를 가리킬 때, 저는 제 학생들이 무조건 따르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지만, 학생들이 시선을 바꿀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제가 원하는 방향을 제대로 볼 것이라고요. 저는 단지 그것을 환기시킬 수밖에 없어요. 제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이 제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관심을 갖기를 바랄 뿐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것은 예술, 기예이지 과학, 기술, 기계가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의 기본적인 몸짓은 누군가의 시선을 지시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리킴을 조각내어 분절해서 보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어떤 조각을 보는 것에 관한 것일지라도, "저기 보세요. 학생 여러분들이 관심을 두고 싶은 것이 저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이 우리가 가리키는 것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교육에는 세 번째 등장하는 것이 있다. - 교육의 3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으로 가자는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왔습니다. 즉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단순히 가리키기만 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잘 들여다보면 교사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거기 보세요!" 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워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가리킬 때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합니다. 가리키면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꺼내 놓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특정한 누군가를 무언가로 끌어당깁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거기 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한 학생이나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거기 봐!"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엇을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육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드디어 말해야 하겠군요. 교육은 항상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있고, 학생이 있고, 세 번째, 무엇 즉 교육의 내용, 혹은 주제, 화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학생들은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교사는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그 무엇이 교사와 학생을 연결합니다. 구조는 간단하지만 매우 정밀합니다.
가르침의 관계 속에 있는 3가지 요소는 명료하게 말하면, 학생, 주제, 그리고 교사입니다. 교사는 학생과 주제가 연결되도록 노력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요소를 위한 세 가지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육과정, 즉 우리가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조직하는 방식, 그리고 학생에게 말하는 교육학, 또 학생과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으로서의 평가가 그 세 가지 도구입니다.
 
 
6) 교육이 단지 지적인 작업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사람들 중 일부는 교육이 매우 지적인 작업인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은 손의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작업을 하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교육합니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지요.
그리고 학생들과 작업을 하면서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초대하기 위해서 몸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과 몸을 사용하여 가르치는 일은 육체 노동의 한 형태입니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통 여기까지의 일입니다. 우리는 온 몸을 활용하여 관심과 주의를 끌고자 하는 시도, 방향을 가리키는 시도를 합니다. 학생의 주의를 강제로 끌어오거나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7) 통제 가능하다는 착각 그리고 통제가 교육이라는 착각
 
일부에서는 학생들의 관심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마치 그들의 모자를 가져다가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줄을 맞추어 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고정시키거나 마음을 강요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가능하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더 이상 교육일 수는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연구들은 효과만 있으면 끔찍해도 교육인 것처럼 발표하기도 합니다.
교육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학생들이 실제로 무엇을 응시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눈, 관심이 움직이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8) 교육적 차이, 가르침이 모두 배움이 되지는 않는다
 
'교육적 차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그것은 교사인 우리가 하는 일과 학생들이 우리의 일에 대응하여 하는 일 사이에 일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차이는 정말 근본적이고 중요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르침과 배움의 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는 가르침이 언제나 배움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들이 있습니다.
배움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자체는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생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학생이 무언가를 할 수 없고, 다른 때는 학생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학생의 상태에 대해 우리는 그 학생이 배웠구나 라고 말해줍니다.
교사는 세 가지 전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를 통해 일어나는 약간의 변화입니다.
둘째, 학생들이 노력해서 배울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이 때 학생의 배움은 개인적입니다. 배움의 흔적, 변화한 것을 볼 수는 있지만 배움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기술이나 동작을 연습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동작을 할 수 있을 때, 그들이 우리가 하라는 것을 모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에게 배움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학습 자체가 아니라 학습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배움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셋째, 가르침이 모두 배움이 되지 않으며, 가르친 것을 기계처럼 따라하는 배움도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일을 시켜서 학생들이 기계적으로 하는 경우 이것은 배움이라고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진심어린 배움은 아닐 수 있습니다.
 
9) 완벽한 교육을 하면 학생의 자리는 없어진다

우리는 때로 교육을 완벽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더 이상 학생을 위한 공간은 없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교사 자신을 위해 교육적 차이를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이를 모두 좁히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차이를 이해하려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 학생들이 배우는 것의 차이가 어떻게 생기는가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있는 곳이 실제로 학생들이 있는 곳이며, 차이를 갖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야 그런 차이가 어떻게 나는지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10) 가리킴의 이중성
 
우리가 가리킬 때, 우리는 학생들을 무언가에 관심을 갖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실에 자극-반응 기계들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들을 통제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각 학생들에게 "저기를 보세요"라고 말하며 초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관심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주체"라는 용어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용어를 써서 설명하겠습니다. 교육 안에서 학생들은 국가의 국민 중 하나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체로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 "주체화"입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는 학생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학생들과 함께 교과서를 읽고 교과서를 연습한다면, 그들이 내면의 이해와 ,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기대들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이런 이상한 작은 틈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학생들에게 달려있다는 뜻일까요?
학생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지식 구조를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존경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세계를 배우고, 이해하고, 숙달하고,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얼어나는지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세계를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배우는 관계가 유일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대 방향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무엇을 묻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자연이 나에게 묻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의 역사가 나에게 묻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이 사회적 환경이 나에게 묻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이 질문이 아마도 더 흥미로운 교육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질문은 훨씬 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묻는 게 뭐지?"라는 질문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것을 보고 당신에게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라고 할 때, 당신은 그 질문을 두 번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세상에 관심이 많은 학생을 깨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의 특질, 그 작은 아이디어, 그 다음에, 제가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또 우리가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할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11) 가리킴에 대한 교사로서의 입장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생들에 대한 가리키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교사로서 갖는 입장에 대한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것이고, 가르침의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관계입니다.
관계의 측면에서 교사는 어려운 입장이 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사는 학생들에게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세요", "나를 따르세요"라고 말하는 권위 있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만약 교사가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고 사라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미 스스로 배우고 있고 나는 그저 필요하다 싶을 때 도움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뭘 놓친 것 같나요?
그래서 여기서 저는 그 전에 언급된 아이디어로 돌아갑니다.
교육에서, 우리는 항상 삼각형 안에 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무엇인가의 삼자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학생들이 그들이 보길 바라는 것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이 되었는지, 무엇을 발견했는지 말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들이 학생 옆에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또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12) 탐험의 종착지 : 교육의 중심부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사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교사가 학생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세상입니다.
저는 지난여름에 나온 작은 책, <세계 중심의 교육>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아이디어를 전개해보았습니다. 그 책에는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인용구를 소개했습니다. 브레히트는 정말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모든 선생님들은 때가 되면 가르치는 것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정말이지 정확합니다. 어느 시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을 떠나기 시작해야 합니다. 브레히트는 교사가 언제 떠나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알기란 매우 어렵지만 가르침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교사로서 물러났을 때, 현실이 교사의 자리를 대신하여 학생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교사의 도움 없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이후 각 나라들의 교육, 과연 교육인가?
 
이제 '펜데믹 이후의 교육'입니다. 저는 이번 펜데믹이 상당히 파괴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파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교육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손실된 과정을 따라잡도록 도울 필요가 있고 교육 시스템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교육에 대한 다양한 압력과 방향제시가 교육 시스템에 여러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방향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일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이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교육의 핵심에는 주의의 문제, 관심의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학생들이 무언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저는 펜데믹이 우리 인류 또는 사회 문화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 왔는지, 무엇에 관심을 두고 또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문제제기하고 질문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육자로서 우리에게 더 엄중한 질문은 우리가 실제로 이런 질문과 문제 제기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즉 학생들이 깨어있도록 돕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우리가 지금 최고의 일을 하고 싶다면, 무엇이 교육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단지 도구가 아닙니다. 교육의 정말 흥미로운 특징은 학생들의 관심을 얻고 주의를 붙잡기 위해 애쓰는 교사의 가리킴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주목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리킴, 방향을 안내함, 관심과 주의를 끄는 것이 교직의 핵심임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교육에 대한 방향 감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데믹 이후, 교육을 도구화한 여러 행위들과 조치들에 대한 실제 결과를 확인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과연 교육인지에 관한 증거, 그리고 제대로 된 교육에 예산을 쓴 것인지에 따른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던 내용입니다.
여러분께 너무 낯설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찾아봅시다.
미리 녹화된 이 강의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여러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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