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있는가

건설노조와 프리미엄을 잃은 비정규직을 위하여

검토 완료

조건준(jogjun)등록 2023.05.26 11:46
비정규직에게 무슨 프리미엄
 
"그렇게 좋은 회사 다니면서 데모해서 시민들 불편하게 하면 안되죠"
삼성전자서비스 기사들이 노조를 만든 직후 서울 남대문 인근을 행진하던 10여 년 전,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들은 짜증을 냈다. 이 반응을 바꾸는 것은 쉬웠다. "저희들 삼성 직원이 아니고 비정규직입니다" 옷에 새겨진 삼성 로고를 가리키며 “정규직 같지만, 사실이 아니고 최저임금도 못 받는 때 많다”고 하자 짜증을 내던 시민들이 "아, 그런 거예요." 하면서 금방 태도를 바꿨다. 이때 ‘비정규 프리미엄’을 느꼈다.

프리미엄은 일정한 가격, 급료에 더하여 주는 여분의 금액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은 임금을 덜 받는다. 국제연대를 위해 외국을 방문했을 때 비정규직에게 할증 임금을 주는 사례도 있었지만, 한국에는 찾기 어렵다. 시장이 아닌 사회 영역에서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 노동에 대한 공감은 더 높다. 이것이 비정규 노동을 위한 거의 유일한 프리미엄이다.

비정규직 노조 대부분은 노조 이름에 ‘사내하청’ 또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넣는다. 비정규직을 강조해 우호적 시선을 기대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귀족노조라는 비난에 대해 “민주노총에 비정규직 노조가 30%다”는 식으로 방어한다. 또한 “최초의 비정규직 출신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식으로 비정규직을 강조한다. 비정규 프리미엄 활용 사례들이다.

비정규 프리미엄은 시장이 만든 차별을 없애는 사회적 에너지다. 그러나 시장에서 작동하는 차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비정규 프리미엄은 위험하다. 이들은 비정규 프리미엄을 없애려 한다. “시험도 안 본 것들이 정규직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능력주의는 비정규 프리미엄을 제거하려는 장치다.
 
프리미엄은 사라졌는가
 
2022년 말, 화물연대의 투쟁은 비정규직 프리미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공격한 정부의 지지율이 오르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건설 현장을 찾아 일하는 건설노동자도 매번 일터가 변하는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건설노조에 대한 공격이 매섭고 심지어 수사받던 건설노동자가 분신하는 상황에서 공분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두 사건은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매우 낮은 상황에서 벌어졌다. 낮은 지지를 받는 정권이 비정규직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건설노동자가 죽기까지 했는데 왜 사회적 공분은 일어나지 않을까. 당사자인 건설노조는 온 힘을 다해 호소하고 저항하며 투쟁하지만, 사회적 연대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부는 계속 건설노조에 대한 압수수색을 늘려가고 보수 언론은 건설노조에 저주를 퍼붓고 있다.

비정규직에 대한 공감과 지지가 왜 혐오나 외면으로 바뀌고 있을까. 당사자인 건설노조나 민주노총 발언을 보면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비정규직이든 뭐든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인 정권이라 비정규직 프리미엄이 작동하지 않는 걸까. 기억하자. 문재인 정부 때 인천국제공항공단에서 능력주의를 앞세운 정규직화 거부 논란이 일어났다. 노동계 일각에서 윤석열 정권을 규탄하고 이제는 퇴진을 외치지만 시민들은 퇴진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또 하나의 외부 요인으로 꼽는 것이 언론이다. 조선일보는 건설노동자가 분신할 때에 곁에 있던 건설노조 동료가 말리지 않았다며 분신이 기획된 것처럼 몰아갔다. MBC는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몇 언론도 조선일보의 왜곡을 지적했다. 다른 기사도 있다. 진보당 간부가 건설노조 팀장 직책으로 출근도 안하고 월급 받았다는 보도에 진보당과 당사자 반박이 이어졌다.

4월 21일, SBS는 <생계권 쥔 건설노조…"당 가입에 후원금 강요">라는 취재파일을 통해 건설노조에서 벌어지는 일을 드러냈다. 공사 끝나면 새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조합원은 강요에 못이겨 진보당에 후원금을 냈다고 한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후원이라는 반박도 있지만, 신생노조를 비롯한 조합원들에게 진보당에 가입과 후원금을 내도록 강요한 사례는 노동계에 꽤 알려진 사실이다.
 
  

5월 17일 MBC의 건설노조관련 보도 MBC는 몇 차례에 걸쳐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건설노조 보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 MBC

       

복합갈등에 시름하는 건설노동자
 
건설산업은 한국 산업계에서 다단계 아웃소싱 원조격이다. 하청구조가 건축 비용을 높이고, 건설 비리를 늘리고, 건설노동자 삶을 갉아먹는다. 건설산업은 열린 야외에서 일하기에 작업장을 공장으로 들여오는 공장화가 어렵다. 그런데 건설산업을 넘어 전 산업에 외주화가 퍼졌고 다단계 하청 원조인 건설업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건설노동자는 하나의 공사가 끝나면 다른 공사장을 찾아야 한다. 건설노조는 조합원 고용안정을 위해 항상 새로운 공사 현장 건설업자로부터 자리를 따내야 한다. 이 때문에 건설노조가 노조인지, 일자리 알선 업체인지를 질문받은 적이 있다. 쌩판 모르는 사람이 아닌 열정적 활동가의 질문이었다.

고용 유동성이 심할수록 잦은 일자리 경쟁이 노노갈등으로 흐를 수 있다. 일자리 경쟁은 상급 단체가 없거나 다른 노조 사이의 충돌과 집단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갈등으로 이어진다. 이주노동자를 몰아내기 위한 집단행동은 진보당과 건설노조가 현수막 논란으로 더 불거졌다.(5월22일자 뉴스플러스의 "진보당, 입만 진보? '일자리 뺏는다 불법외국인 혐오, 배제 현수막 게시 논란" 참조)

언론에 나온 진보당의 건설노조 지배개입까지 생각하면 복합갈등에 휩싸여 있는 것이 건설노동자다. (복합갈등 = 원조 다단계 산업 + 고용 유동성 + 일자리 갈등 + 정주/이주민 갈등 + 정파구도) 이렇게 갈등이 겹치면 해결은 어렵다. 이 복합적 갈등 구조는 건설 노동자나 건설노조 조합원 탓이 아니다. 건설노조도 지역과 업종에 따라 정파의 개입이나 갈등 해결 역량이 다르다. 이 점에서 언론의 공격을 받는 사례와 무관한 건설노동자는 매우 억울할 것이다.

 데모스는 어떻게 사라질까
 
"당에 가입 안하면 노조원으로 인정을 안하다보니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어쩔 수 없이 돈을 내야했다." 위에서 언급한 SBS보도에 등장하는 건설노조 조합원 얘기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조는 '자주성'이 없다. 노조 안의 갈등 구조와 노조 밖의 정파라는 내외적 요소가 결합하면 '타락한 정파 + 도구가 된 노조 = 실패한 운동'이라는 결과를 빚어낸다. 노조의 자주성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민주노조'가 아니라 '어용노조'다. 우익 정권이나 정당에 지배당하는 노조만 '어용노조'가 아니라 좌익 정권이나 정당에 지배당하는 노조도 '어용노조'다. 노조는 지배 당함으로서 왼쪽이나 오른쪽에 줄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나가야 한다.

건강한 시민 없이 건강한 사회 없다. 건강한 시민이 데모스다. 데모스란 유명한 정치인이나 돈 많은 부자와 같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을 의미한다. 시민, 민중, 노동자계급, 다중을 비롯해 데모스는 다른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공유 경험을 가진 시민들은 공동체를 바꾸고 만들어내는 데모스다. 건강한 조합원 없이 건강한 노조 없다. 노조의 데모스는 평범한 조합원이다. 다중적 갈등 속에서 생존을 위한 실리와 정파의 지배개입이 결합하면 건강한 조합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맨날 듣던 민주노총 사람들 발언은 재미없어요. 청년, 비정규직, 다양한 시민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런 얘기가 생생하고 재밌죠. 이럴 때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야죠." 탄핵 촛불 집회에 참여하던 2017년, 현장 조합원들 얘기다. 집회 준비를 위해 여러 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한 회의에 참가한 몇 분이 집회에서 발언을 늘리려는 민주노총을 불만스러워했다. 조직과 재정 규모가 크다고 발언을 많이 하는 것은 소아적이다. 마이크를 쥐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호감이 늘어난다. 현장은 이것을 아는데 왜 위로 갈수록 모를까 싶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스피커를 내주려던 현장 조합원 열망처럼 거대한 촛불을 통해 새로운 데모스 탄생을 기대했다. '촛불시민'은 새로운 데모스가 될 것 같았다. 탄핵 촛불 이후에 번진 미투운동은 새로운 에너지를 품은 것 같았다. 그러나 급진 페미와 반페미 논란에 휩싸였다. 조국 사태와 태극기 집회로 광장은 분열했다. 문재인 정권은 윤석열 정부로 바뀌었고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쪽은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 반북‧반중 정서를 부추기고 반일‧친북‧친중을 적대한다. 분열된 광장과 혐오 정치에는 데모스가 없다.

'전후세대' '518세대' '87세대' 등은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을 공유한 시민의 이름이다. 반면에 'X세대' 'Y세대' 'MZ세대'라는 호칭은 태어난 순서대로 나열된 이름이다. 물론 판매전략에 따라 특정 소비자를 만들어내려는 상업적 세대 개념이라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그러나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을 담은 이름과 사뭇 다르다. 요즘 ‘MZ세대’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것을 보면 ‘MZ세대’ 특권화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이 새로운 데모스 출현을 가로막는다.
 
비정규 운동은 어떤 시민을 탄생시켰을까
 
불안정 노동이 늘어난 후 등장한 비정규 운동을 통해 새로운 노동운동 주체가 등장할 것처럼 보였다. 비정규 운동이 본격화된 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어떨까. 비정규직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정규직과 차이를 보일 뿐, 사회적 인식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판적 사회정치 의식이 노동시장의 비정규직 문제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비정규직 또한 자신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갇힌 정규직 이기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불평등시대 국민인식 조사결과 보고서’. 2023.05.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노회찬재단)
 
보고서는 정규직의 이익 추구는 차별을 더 심하게 만들지만, 비정규직의 이익 추구는 불평등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하청 업체에서 나타난 비정규직 노조들, 고공농성과 단식투쟁, 분신과 자결 그 치열한 장벽을 넘어오는 과정은 혹독했다. 외로운 비정규직은 법원으로 향했다. 정규직으로 계층상승을 위한 소송이 이어졌다. 운동보다 소송이다. 그래서 “니들이 하는 것이 계급운동이냐, 계층상승운동이지. 계급운동 아닌 개(犬)급운동이라구” 꽤 오래전 비정규 운동을 하던 후배들에게 이렇게 떠들었다. 응원을 보내야 하는데 찬물을 부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처럼 정규직이 되고 난 다음에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사례들이 있다. 최근에도 정규직이 된 프리랜서들이 결국은 자신들과 함께한 비정규직 노조를 탈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따로 노는 사례를 보았다. 어떤 신생노조 간부들은 “비정규직으로서 투쟁할 때, 우리는 사회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연대보다 우리 이익만 챙기려는 모습이 늘어 갑니다.”며 걱정한다. ​
 
의미 없는 변명
 
유사한 노동시장에서 격차가 심하지 않을 때, 조직율이 낮아도 노조가 전체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 격차가 크고 분절된 노동조건을 가진 상황에서 대기업과 공기업 조직율은 높아 전체 노조 조직율을 끌어 올린다고 해도 노조는 노조 밖 노동을 대표할 수 없다. "민주노총에도 30% 넘는 비정규직 노조가 있습니다."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는 정규직 귀족노조라는 비판에 민주노총은 이렇게 대응한다. 그런데 점점 의미 없는 얘기가 되고 있다. 

첫째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다.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비정규직이 기성노조에 가입해 활동하면 같이 검어진다. 1차 노동시장에 진입을 꿈꾸는 비정규직 노조는 정규직화에 성공하면 기성노조에 흡수된다. 정규직이 되지 않았더라도 정규직 중심인 상급 단체에 가입하면서 시스템에 흡수된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비정규직 노조는 민주노총 이름에 묻혀 비정규 프리미엄을 잃는다. 비정규직 노조가 늘어나는 것이 노동운동의 변화와 신개념 노조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순히 양적 증가에 묻히고 있다.

둘째로 비정규 프리미엄을 악용하는 일이 생긴다. ‘민주노총 최초의 비정규직 위원장’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정규 출신이라는 것은 겉모습이고 실제는 정파 이익을 챙기는 조직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비정규 프리미엄을 악용했다는 얘기다. 건설노조 사례에서 논란되고 있지만 정파 조직원이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비정규직 경력을 얻어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종종 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신분 세탁”이나 이런 행동을 하는 정파를 향해 “노조에 빌붙은 기생충”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건설노조 나팔차 눈에 가장 잘 띄는 노동조합의 차량은 아마도 건설노조의 나팔차일 것이다. 이는 건설노조와 연결된 상징적 이미지 중의 하나다(사진은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 민주노총

 

건설산업 노조들의 나팔차는 거리에서도 눈에 잘 띈다. 왜 이렇게 과시적으로 보이는 나팔차가 필요할까. 건설 현장 집회를 가면 금방 알 수 있다. 소음이 크고 넓은 야외의 건설 현장에서 구호를 외쳐봤자 눈에 띄지 않는다. 타인들에게는 위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건설산업의 노조들에게 나팔차는 필수 시위용품이다. 나팔차 만이 아니라 건설 노동자의 투쟁문화는 더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지만, 노조의 이런 모습은 위압적이다. 이런 모습을 과장해 비틀면 ‘건폭’ 이미지로 연결된다.

‘건폭’ 이미지를 정권과 보수 언론이 악의적으로 씌웠지만, 그렇다고 노조 스스로 성찰해야 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쇠를 다루는 제조업에서 갈등이 격해져 극단에 이르면 현장에 있는 것으로 싸우게 된다. 쇠파이프가 등장하고 볼트, 너트가 날아다닌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과격한 이미지를 얻는다. 대중성과 사회성을 잃는다.

장례를 미룬다고 되살아나지 않는다
 
건설 현장에서 서로 다른 노조가 충돌해 폭력이 발생해 이슈가 되었을 때, 언론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건설노조 당사자가 아니기에 보도하지 않는 조건으로 건설 현장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 해결책으로 ‘일자리 쿼터제’를 얘기했다. 건설 현장이 생기면 건설노조와 건설업자와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일정한 비율로 나누는 합의를 만드는 것이다. 일부 업종에 건설노조 6. 다른 노조 2, 건설업자 결정하는 몫 2로 나누는 암묵적 관행도 있는 것으로 안다. 이에 대한 공식 노사합의나 정부를 포함한 사회적 합의는 없다.

합의는 끈질긴 노력과 설득이 필요하다. 노사교섭이나 사회적 합의와 같은 공론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담배를 피워대고 쓰레기만 남기는 집회라는 악의적 언론의 타겟이 되는 과시적 집회 동원만 반복할 뿐 공론장을 만드는 실력을 키우지 못한 것은 아닐까. 현장조합원과 일부 간부의 결탁, 무책임한 권리 추구로 인한 생산성 문제가 얽혀 의견을 모으기 만만치 않은 속사정도 있겠지만, 공론화를 통해 출구를 찾는 것은 당사자들 몫이다.

현장 통제력이 강한 노조의 가장 강한 수단은 파업이다. 파업은 과격할 것 없이 그냥 일손을 놓는 것이다. 이런 곳에 필요한 것은 훌륭한 조합원과 유능한 활동가다. 정치적 동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과시적 집회를 원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쥐는 선동가다. 마이크를 쥐고 싶은 활동가나 정치가들이 꽤 많다. 플랫폼 프리랜서를 비롯해 오늘날 양산된 노동들은 분산되어 노동을 통제할 힘을 갖추지 못해 이슈를 만들어 관심을 집중시키려 한다. ‘관종끼’가 어느 정도든 현장 통제력이 없으면 거리나 온라인에서 주목받으려 애쓴다.

조직력을 갖춘 기성노조에서 공론장을 만들지 못한 무능한 정파와 간부는 조합원을 동원한 식상한 집회에 의존하고 사회적 지지는 바닥을 향한다. 새로운 노동은 아직 취약한 생산 통제력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관성을 비우지 못했고 새것을 채우지 못한 공백이 크다. 이 공백 상태에서 MZ세대노조는 특권화 된다. 산업은 변하고 있고 노동시장도 바뀐다. 비정규 운동은 정규직화와 같은 쟁점이 무색하게 변하고 있다. 플랫폼 프리랜서와 같은 노동자들에게 맞는 목표, 투쟁문화, 조직화 경로가 필요하다.(2022년 10월 25일 노동권익 포럼 <새로운 노조의 가능성과 과제> 참조)

집단으로서 노조는 잘 죽지 않는다. 조직력을 가졌기에 웬만해서 해체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지지를 잃고 지탄을 받아 사회적 차원의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비정규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건폭’이라는 이미지를 쓴 건설노조는 그런 위험에 놓여있다.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사례로 한국 비정규 운동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정규 운동 전반에 유사한 요소들이 곳곳에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비정규 프리미엄은 사회적 공감과 지지다. 이 사회적 자산을 살리지 못하면 프리미엄은 사라진다. 비정규 운동은 이 지지와 공감을 잘 살려 왔을까. 프리미엄을 살리지 못하는 관성적 태도 때문에 화살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장례를 미룬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날 리 없다. 건강하다면 장례식을 준비할 이유가 없다. 비정규직 30%가 포함된 기성노조가 건강하면 걱정이 필요 없다. 죽음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 오래된 대응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이다. 오월의 신록처럼 다시 푸르른 노동을 소망한다.

 

근조 근조 ⓒ 조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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