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육군 대장 시절의 정일권
전쟁기념관
박정희 정권 때 외무부 장관을 거쳐 6년간 총리를 지낸 데 이어 6년간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정일권은 "순풍에 돛단 관운"(경향 1964.5.11)의 주인공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랬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평가되는 사건이 정인숙 스캔들이다.
1970년 3월 17일 밤중에 서울 마포구 절두산 근처인 한강 북쪽 강변3로(현 강변북로 일부) 도로에 승용차 1대가 정차됐고, 25세 요정 직원인 정인숙이 머리와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진 채 발견됐다. 수첩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더불어 정일권 총리의 이름이 나왔고, 세 살짜리 아들이 박정희 아니면 정일권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1993년 12월 17일 자 <동아일보> 기사 '횡설수설'은 "여의도 국회의장실에 들어서면 역대 의장들의 초상화에 압도당한다"며 "거의 실물 크기의 이들 초상화를 일별하다 보면, 우리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부침을 실감케 된다"고 한 뒤 "9대 정일권 의장은 천하가 부러워하는 관록을 누렸으나 근년 정인숙 여인과의 실자(實子) 문제로 송사에 시달렸다"라고 평했다.
정일권의 인생이 정인숙 스캔들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이 될 만한 것은 친일행위였다. 정일권의 친일은 영화나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일제 패망 직후에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체포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다.
그는 1985년 6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회고록인 <비화 6·25> 제7화에서 "나에게 남 모를 절박한 기도의 순간이 세 번 있었다"고 한 뒤 "두 번째는 8·15 해방 직후였다"라고 말했다. "믿었던 동향 친구의 배신으로 소련 비밀경찰(KGB)에 붙잡히고 말았다"라며 유배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끌려가면서 겪은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어 시베리아 유형(流刑) 열차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차 안에는 다발총을 옆구리에 낀 소련군 병사 한 명이 나를 감시했다. 탈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열차가 하얼삔역 근처의 오르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탈출을 결심했다. 마음 속으로 하늘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다. 이어 나는 소련군 감시병을 발로 걷어차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자연과 인류를 극도로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파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줄 리는 만무하지만, 그는 기도를 통해 확신과 용기를 다지며 탈출을 감행했다. 그가 친일을 하다가 이런 일까지 겪었지만. 친일청산이 억압된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친일 스캔들이 아닌 정인숙 스캔들만 크게 부각됐다.
7일 먼저 태어난 박정희와 비슷한 길
자기가 부역하던 나라의 멸망으로 고초를 겪은 정일권처럼, 그의 아버지인 정기영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정기영은 러시아제국(제정 러시아)을 위해 일하던 사람이었다. 정일권이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일권 편은 "1922년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극동 지역에 밀려와 극동혁명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제정러시아의 극동군 통역 장교인 부친이 면직되고 감시받게 되자 모친과 함께 경원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아버지 정기영도 처벌을 피하고 함북 경원으로 돌아왔다. 혼란기에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극적으로 귀환하는 정기영의 모습이 1945년에 아들 정일권에게서도 나타났다. 두 부자가 겪은 일은 맥락은 다르지만 외형은 비슷했다.
정일권은 경원보통학교와 룽징(용정) 영산중학교 및 광명중학교를 거쳐 18세 때인 1935년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펑톈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 뒤 1937년에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자신보다 7일 먼저 태어난 박정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만주국의 또 다른 사관학교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신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육사로 진학한 박정희처럼, 정일권도 일본에서 두 번째 사관생도 생활을 했다. 박정희처럼 교사 생활을 하다가 간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졸업은 박정희보다 4년 빨랐다. 그래서 박정희보다 많은 시간을 친일에 바칠 수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지린부대 교관에 보임되었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 계인주·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 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 중위로 진급했다.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정일권이 일본 군대의 밥을 먹은 기간은 상당하다.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러 입소한 1937년 6월 1일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8년간이나 먹고 자고 돈 받으며 부역했다. 그렇게 친일재산을 축적하다가 일제 패망 직후 KGB에 붙들려 러시아로 끌려갈 뻔했던 것이다.
극적으로 탈출해 평양을 거쳐 서울에 진입한 정일권은 가방끈을 좀더 늘리는 일에 착수했다. 늘어난 가방끈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그려졌다. 해방 4개월 뒤인 12월 15일, 그는 미군정청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뒤 대위로 임관한 그는 중대장·연대장·참모부장을 거쳐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이 됐다. 그 뒤 미국 참모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진 직후에 귀국해 33세 나이로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국가범죄인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사임했다가 육참총장에 재기용됐고, 합참의장을 거쳐 1956년 39세 나이로 대장 계급장을 달고 예편했다.
2023년 굴욕외교의 밑바탕 된 정일권의 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