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부인 묘소 찾은 김학철옹지난 2001년 6월 3일 경남 밀양을 방문한 '항일 독립군 마지막분대장' 김학철옹이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여사의 묘를 찾아 묵념하고 있다.오른쪽부터 김옹, 박여사의 조카, 김원봉의 여동생.
연합뉴스
젊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사실의 재구성을 거치면서 역사학에서는 하나씩 둘씩 복권됐다. 김학철은 <최후의 분대장> <격정시대>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한국에서 다수 출판되었고, 1989년 이후 일곱 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여행객도 그를 알고 있으니 복권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나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몇 년 전 <암살>과 <밀정>이란 영화를 통해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부활한 경우가 있으나 그나마도 의열단이 포커스였지 조선의용군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김학철의 월북에서 조선의용군 역사가 남북에서 어떻게 됐는지 짚어보았다. 다시 다른 월북 사례들도 몇 개를 더듬어 오늘을 가늠해본다. 김학철은 그를 수행했던 간호사 김혜원과 북한에서 결혼했다. 김혜원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집이 있는 부천으로 월남했고, 갓난아들을 안고 다시 월북하여 부군에게 돌아갔다. 아마 같은 루트를 경유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38선이라지만 오가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목숨과 바꾼 월경
60년이 훨씬 더 지난 2013년 9월 임진각과 오두산 전망대 사이의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탄포천에서 한 남성이 철책을 넘었다. 초병의 통제에 응하지 않고 임진강에 입수했다가 우리 초병의 총격에 사망했다. 2020년 9월에는 연평도 해역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해상에서 실종됐고 이번에는 북한 초병의 총격에 숨졌다.
착잡하다. 철책선 경계근무가 철저해졌음을 칭찬할 것인가, 월북 행위는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것인가. 월북을 하게 된 처지나 그 무지를 비난할 것인가. 제삼자가 보면 남북이 적대적으로 합동하여 아직도 '야만의 시간'을 철통같이 그대로 세우고 있을 뿐이다.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것은 국경 양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 경우 검거해서 조사하고, 필요하면 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이 문명세계의 상식이다. 초병은 근무지침에 따라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지만, 초병 개인의 단독 행위가 아니다. 초병을 그 자리에 세운 군, 군을 세운 정부, 정부를 세운 국민 모두가 합동으로 취한 행위, 곧 국가의 행위다.
38선 월북이, 군사분계선 월북이 과연 현장의 즉결처분감인지는 되짚어볼 수 없을까. 몰래 감행한 월북이란 남한의 총격을 피한 다음에, 북한의 총격까지 피해야만 살아서 도착하는,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살 행위인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전쟁이 멈추기 전까지 30만~35만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군 자료를 감안한 숫자라고 한다. 월남의 결과로 남한은 인구증가 이외에, 좋든 아니든, 무엇을 얻었다. 그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은 인구감소 이외에 무엇을 잃었을까. 이런 질문은 한국전쟁의 득과 실을 따지는 것과 같아서 답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일단 월북 자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사연구된 것이 거의 없다. 월남이란 현상은 남한 학자들이 늦게라도 연구할 수 있었지만 월북자들에게 대해서는 연구는커녕 기본적인 자료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주장이나 발표는 아주 단편적인 팩트 몇 조각을 가끔 얻는 정도이다. 월북 숫자부터가 그렇다. 북한의 발표를 찾아봐도 숫자에 대해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월북 이후에 남북 양쪽에서 사라져 간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그렇게 사려져간 문학사를 짚어보기 위해 깊은 숨 한번 내쉬고 임진강과 한탄강을 거슬러 철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