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란히 걷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0월 대한민국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자 일본 정부는 극렬하게 반발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국제법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판단입니다", "나라와 나라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라며 자신의 심경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는 2019년 반도체 관련 3개 품목의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등의 통상 공격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더러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분립 원칙을 존중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례한 요구였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과거에 한국과 일본이 아베가 말한 것 같은 약속을 맺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문제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외교 문제에서 상대측이 억지 주장을 펼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 쪽이 앞장서서 상대측의 억지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바로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지난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공동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2018년에 그동안 정부의 입장과 또 정부의 65년 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선고가 됐습니다"라며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는 듯 발언했다.
3월 21일 국무회의에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은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며 마치 모든 청구권이 경제 협력 자금 수령으로 해결된 듯 발언하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발언을 두고 외교부는 그때 받은 무상자금에는 강제동원 피해보상 성격도 들어있다고 해석했다.
2012년 정권을 접수한 일본의 극우세력은 그 후 내내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와 관련하여 '강제동원은 없었다', '청구권 협정으로 조선인 노동자가 청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는 소멸했다'라는 주장을 끈질기게 펼쳐 왔다. 이는 상당한 선전효과를 발휘해 오늘날 일본 국민 가운데 이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될 때면, '또 그러냐. 벌써 몇 번째냐' 하며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인다. 일본에서 혐한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한 데는 이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방미를 앞두고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말해 또 한 번 논란을 자초했다. 대통령은 '무조건 무릎 꿇으라' 하는 표현을 쓰면서 아마도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본의 극우세력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일부 일본 국민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조건 무릎 꿇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라도 이런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정도(正道)이겠지만,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으로서 그런 정서를 불가피하게 대변할 때도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건 일본 정치인의 일이 아닌가. 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인의 혐한 정서를 내면화해 스스로 일본 정치인의 역할을 떠맡는가. 우리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 총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드러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의 일본 국내 지지율을 끌어올려 주고 일본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배경에 어떤 정치 문법이 작용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제(5월 7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인식 문제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일방의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발표한 해법(제3자 변제안: 인용자)은 65년 청구권 협정과 2018년 법원의 판결을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안으로서 법적 완결성을 지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다시 한번 입장을 밝혔다.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전 칼럼과 이 칼럼에서 밝혔듯이, 대한민국 대법원의 확정 판결은 일본 기업의 조선인 노동자 동원이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였다고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동원 노동자와 관련한 네 가지 권리 가운데 세 가지가 엄연히 살아있음을 분명히 판시했다. 제3자 변제안이 이 판결을 충족한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정치 문법을 계속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가 "당시에 힘든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일을 당한 일에 대해서 마음이 굉장히 아프다"고 발언했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해 사과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건에서 가해자가 마치 제3자인 듯 성의 없이 내뱉는 립서비스처럼 들릴 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일 정상 소인수 회담에서 먼저 기시다 총리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거나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국민은 이런 정치 문법을 언제까지 참아줄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민심은 바다와 같아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금언을 떠올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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