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출입통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
윤태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학계의 추정치는 월남 150만, 월북 30만~35만이다. 1947년 6~7월에 개성 수용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31,859명 가운데 생활난(20,731명 65.1%)과 귀향(9,400명 29.5%)이 많았다. 구직과 진학이 각각 82명(0.3%), 892명(2.8%)이었고 상행위가 252명(0.8%), 가장 많을 것 같은 사상적 이유는 502명(1.6%)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도 굳이 발설하지 않은 월남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월남은 조사에서는 소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개혁과 토지개혁으로 친일 그룹과 지주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남한으로 와서는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강렬한 반북한 조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미 원한과 복수라는 데칼코마니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북한의 우익은 남으로, 남한의 좌익은 북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평양의 두 권력은 강력한 구심력과 원심력을 휘둘렀다. 자기편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편도 강력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이 계속됐다. 월남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의 우익은 극우로, 북한의 좌익은 극좌로 치달았다.
통계로 잡힌 정치적 월남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생활난으로 월남한 빈농층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38선을 가장 많이 넘나든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문 38꾼들, 곧 밀무역 상인과 월경 안내인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은 월경 안내와 짐꾼을 겸하기도 했다.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던 조선을 남북으로 분리하자 물자의 수요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 38선으로 집과 논밭이 갈리기도 하고 시장이 38선 건너편에서 열리기도 했다. 크게는 남한에서는 중공업 화학제품이나 전기가 부족했고 북한에서는 경공업 생필품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곧 이윤이었고, 이윤이 커질수록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전쟁 전이라지만 처벌 가능성이 상존하는 38선 지역에서도 생업이 활발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일제가 패망하고 38선으로 느닷없이 갈라진 후에도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반면 38선을 긋거나 그것에 기댄 상하좌우의 권력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시국을 폭발의 임계점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월남이라는 격렬한 인구이동은 국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핏물이 배어나오는 살벌한 현실이었다. 그 서사는 오랫동안 반공 웅변대회의 주된 소재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젊은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쟁을 포함한 현대사를 역사학의 연구주제로 삼아 세밀하게 사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당한 연구 결과가 쌓여왔으나 대중적으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쌓여온 반공을 위한 반공교육 덕분인지 넓고 두꺼운 공포심이 무의식까지 적시고 있다.
그런데 남한과 미군은 월남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지만 북한은 월북을 반겼을까. 다음 편에서는 대개 이념을 찾아 간 것으로 생각하는 월북자들의 발자국이 남은 곳을 찾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