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29일(현지시간)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미국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을 방문해 서재필 재단, 이승만 기념사업회, 재향군인회 등 주요 내빈들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3.4.30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진영에서 공식 추방된 사람
보훈처의 30일 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민식 처장은 좌담회 다음날인 29일에는 서재필의 독립운동 흔적이 있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현 명칭은 Play&Players Theatre)을 방문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4~16일에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미국 사회에 알린 역사적 현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김승태 전 독립기념관 자료과장이 쓴 <서재필: 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 개혁의 선구자>는 3·1운동 직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국내 운동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동포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한인연합대회를 여는 것"이었다며 서재필의 제1차 한인회의 개최 과정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이 대회는 짧은 준비기간과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사회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라고 하고 나서 "한인 대표들 가운데는 이승만·정한경·민찬호·윤병구 등이 있었고, 학생들 가운데는 임병직·김현철·장기영·조병옥·유일한 등이 참석했다"고 서술한다. 서재필이 이승만 등의 협력을 받아 주최한 대회였던 것이다.
보훈처장이 이곳을 방문한 일차적 목적이 서재필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보훈처 보도자료를 봐도 서재필보다 이승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보도자료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가 극장 앞에서 한인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라며 이승만을 서재필보다 앞에 뒀다. 윤석열 정권 들어 보훈처가 이승만 재조명에 열의를 쏟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 처장 방문의 일차적 목적은 이승만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재필이 주최한 제1차 한인회의는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승만이 이 회의에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이승만 재조명의 자료로 활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대회 2개월 전에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발송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이승만은 하자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그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가 1925년에 탄핵했다. 한국이 국제연맹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승만은 임시대통령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도리어 독립운동을 방해하다가 탄핵됐다.
헌법재판소 기능을 수행한 임시정부 이승만심판위원회는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어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애(妨礙)하였고" 등의 표현을 써가며 이승만을 내쫓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립운동진영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된 사람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핵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의 탄핵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정부는 그런 이승만에게 1등급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이 일은 1949년에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일 때였다. 독립운동진영에서 쫓겨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건국훈장 셀프 수여가 1925년 탄핵을 사면하지는 못한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앞세워 이승만 띄우기에 과도한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다. 보훈처장이 미국에 가서 좌담회까지 열고, 왜곡된 역사지식을 한국으로 송출하고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방해한 일 때문에 1925년에 쫓겨나고, 장기독재·부정선거·민간인 학살 등을 저지른 일 때문에 1960년에 또다시 쫓겨났다. 그런 이승만을 띄우는 것은 이승만 시대의 정치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로밖에 볼 수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로 한국인들을 데려가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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