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두용은 탈출자금을 오마모리에 숨겼다 - 일본군에서 개인용품은 검사대상이었지만 오마모리는 상관들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제공: 남명애)
집에 연락해 조선은행이 아닌 일본은행이 발행한 1백 엔짜리 지폐로 2백 엔을 마련했다. 도쿄 유학생 한달 하숙비가 20엔이었으니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인 병사들의 호신용 부적인 오마모리라는 주머니에 현금을 넣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마모리는 소지품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 학도병들 누구나 끊임없이 탈출을 생각했을 것이다.
탈출 자금을 준비하는 한편 남두용은 학도병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사훈련과 내무생활에 모범이 되려고 애썼다. 그의 상관은 남두용을 좋게 평가하여 교육 조교로 내심 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남두용은 전선으로 차출되지 않고 조교로 남을 수 있었다. 남두용은 함경북도 회령의 관동군 보병부대에 배치됐다. 같은 부대에 조선인 학도병은 27명이 있었다.
복무 중에 애국가 사건이 있었다. 남두용이 내무실 오락시간에 노래를 부르라고 지목되자 충동적으로 애국가 1절을 불렀다.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 병사들은 박수를 쳤다. 조선인 병사들은 나라를 생각하는 노래라는 것은 짐작했다. 정작 남두용 자신은 조선인 병사가 밀고하지 않았을지 한동안 불안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국가를 아는 병사가 없었다.
이 사건 이외에 다른 불령한 행동은 없었다. 청춘의 반항심은 날카롭지만 일상의 굴복은 밋밋해보여도 묵직했던 게 보통의 삶이었다. 남두용은 일군의 조선인 병사들을 일본 나고야 근처의 아이지현까지 인솔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경원선 열차를 타고 한탄강철교 남단의 38선 그 지점을 또 지났다. 이번에는 일본군 병사로서 공무출장이었다.
그렇게 더딘 시간이 흘러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그날, 남두용은 두만강 철교의 경비부대 소속이었다. 그는 일본군 병사 신분이었기에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가 된 채 도문(투먼)역 근처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후 일본군은 소련으로 이송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남두용은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조교로 교육시켰던 조선인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탈출계획을 알리고 동참하려면 내일 모처에 모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모처에 조선인 병사 전부가 모였다. 이 순간에 정말 뜨거운 환희를 맛보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두용은 이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4일 동안 170킬로미터를 걸어 귀향했다. 징병으로 끌려갔으나 운 좋게 살아서 돌아왔다.
귀향한 남두용은 청진시의 나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1월 교사들이 반탁시위를 일으켰으나 인민위원회에 의해 바로 해산됐다. 교사들은 연금처분을 받았다. 남두용은 토지개혁까지 눈앞에 닥쳐오자 38선을 넘기로 결심했다.
1946년 1월 출발했다. 걸어서 경성까지, 트럭을 얻어 타고 북청을 거쳐 원산까지 남하했다. 불시검문을 피하려고 원산과 성진(지금의 김책시)에서는 노숙을 했다. 경원선은 원산에서 복계역(철원 직전의 역)까지만 운행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화물칸 지붕에 얹혀 갔다. 그 다음엔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걸었다. 얼어붙은 한탄강을 새벽에 건넜고 건넌 지 얼마 가지 않아 미군 초소가 나왔다. 별다른 문제없이 통과했다. 아직은 38선이 얼어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곱번째 건넌 한탄강철교
남두용은 한탄강철교 남단을 일곱 번째 통과하면서 비로소 북위 38도가 운명의 구획선이 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여섯 번이나 무심하게 통과했던 이 지점을 통과하는 것은 이제 특별한 정치적 행위였다. 남으로 가면 본인은 타향의 외톨이였고, 북에 남은 가족은 반동분자라는 불이익을 고스란히 덮어써야 했다.
남한에서는 식민지 관리와 지주 계층은 해방 직후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미군 진주와 함께 빠른 속도로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남한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부농이나 중농이거나 식민통치의 관리나 경찰 출신들은 많은 수가 월남으로 몰렸다.